
23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열린수장고. 일반인이 발을 들이기 어려운 이곳에 국가무형유산 전승교육사와 이수자, 전수생들이 고궁박물관 학예사들과 함께 자리했다. 책상 위에는 박물관이 소장 중인 조선 왕실의 유물들이 놓였다.
무형유산 전승자들은 조명이 달린 돋보기 등으로 유물을 살피고 휴대전화로 찍었다. 학예사들이 줄자 등으로 유물의 길이를 재면 전승교육사 등은 수치를 받아적었다. 무형유산 전승자들이 조선 왕실의 유산을 가까이서 살펴보는 ‘수장고 속 왕실 유산 심층조사’는 이렇게 이뤄지고 있었다.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올해부터 무형유산 전승자를 대상으로 한 수장고 속 왕실 유산 심층조사를 운영하고 있다. 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인 왕실 유산을 여러 명의 무형유산 전승자에게 동시에 공개하며 조사하도록 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상반기인 지난 5~6월에는 총 세 차례에 걸쳐 바느질 장인인 침선장과 자수장, 직물 위에 찍는 금박문양 장인인 금박장 등의 무형유산 전승자 10명이 참여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입었던 정복인 곤룡포, 영친왕비가 입었던 예복인 당의 같은 왕실 의류 36건 37점을 살폈다.
하반기에는 영친왕이 썼던 모자인 탕건과 이를 보관하던 탕건집. 영친왕비가 사용했던 백옥쌍룡단작노리개와 백옥영락잠, 영친왕비가 신었던 신발인 청석, 당혜 등 왕실의 장신구 및 관련 유물 총 22건 27점이 조사 대상이 됐다. 탕건 장인인 탕건장, 매듭과 술을 만드는 기술 장인인 매듭장, 전통 신발 장인인 화혜장 분야 총 10명이 지난 16일과 이날, 오는 30일까지 총 3일간, 하루에 최대 3시간씩 조사를 진행한다.

왕실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을 보유한 전승자들도 실제 조선 왕실에서 쓰인 공예품을 가까이서 보기는 쉽지 않다. 전승자들이 박물관 측에 유물 열람을 신청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 방법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거니와 여러 분야 전승자들이 함께 왕실 유물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드물다. 이번 심층조사는 왕실 유물을 가까이서 볼 기회인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무형유산 전승자와 고궁박물관이 정보를 교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금박장 전승자가 금박이 새겨진 왕의 옷을 보면서 다른 전승자로부터 옷감이나 바느질, 자수 관련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심층조사는 기존에 알고 있던 기술을 다듬거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는 자리다. 제주에서 온 김경희 탕건장 전승교육사는 “영친왕의 탕건이 말총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세하고 정교한 만듦새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며 “이번 기회에 가까이서 본 이 탕건을 보다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가업으로 6대째 화혜장을 이어받은 황덕성 화혜장 이수자는 청석, 당혜의 치수를 기록하며 “할아버지들께서 만들어 놓으신 작품과 그 데이터에 더해, 이번에 더 정확하게 알게 된 정보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유물을 소장한 고궁박물관 측에게도 이번 조사는 연구가 미진한 유물에 대한 정보를 무형유산 전승자로부터 얻을 좋은 기회다. 이날 공개된 조사 대상 중 모자의 일종인 와룡관은 중간에 구멍이 나 있는 등 일부가 훼손된 상태라 전시에 출품된 적도 없다. 고궁박물관은 무형유산 전승자들의 조사를 통해 복원에 필요한 관련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 고궁박물관은 심층조사를 향후 확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