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숫자가 말하지 않는 시장, 브라질

2025-06-17

숫자는 불완전한 언어다. 때로는 그 너머 중요한 맥락과 이면을 가리기도 한다. 어떤 나라는 낯설어서 어렵고, 어떤 나라는 익숙해서 위험하다. 브라질은 후자에 가깝다. 드러나는 숫자로만 보면 브라질은 '기회의 땅'이다. 세계 5위 면적, 7위 인구, 10위권 경제 규모. 너무 자주 반복돼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기업이 희망에 차 브라질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현장에 닿는 순간, 심장은 식고 셈법은 새로 짜인다.

관세는 높고, 인증은 복잡하며, FTA는 제한적이다. 노동은 경직돼 있고, 위험은 비용이 되고, 비용은 마진이 된다. 크지만 닫힌 시장, 넓지만 들어가기 어려운 구조. 오죽하면 옛 브라질 주재원들 사이 가장 회자되던 말이 'NWH'였을까. “(N)네가 (W)와서 (H)해봐”. 이 짧은 한마디에, 책상 위 기대감과 현장 속 현실의 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럼에도 브라질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브라질을 포기한다는 건, 남미의 절반, 중남미 전체의 3분의 1을 접겠다는 뜻이다. 다만, 보는 눈을 달리해야 진짜 수요가 보인다는 얘기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수요가 보고서, 숫자 뒤가 아니라, 언제나 현장 한복판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진짜 수요를 찾아낸 순간, 제약은 기회가 되고, 경쟁자를 거르는 필터가 된다.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만큼, 먼저 들어간 자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제조업을 보자. 브라질은 세계 8위 자동차 생산국이자 3위 민항기 제작국이다. 그래서인지 '브라질은 다 만든다' '그래서 제조업 제품 수출은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브라질 제조기반은 보기보다 느슨하고 군데군데 공백이 많다는 점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 겉은 '자립형 제조' 같지만, 들여다보면 '기술공백'을 메우기 위한 해외 의존이 뿌리 깊다. 즉, 조립은 안에서 하지만, 핵심은 밖에서 들여오는 구조다. 브라질 정부가 NIB, PDP 등 다양한 정책으로 제조업 빈틈을 메우려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래서 제조업 수출은 어렵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표면만 보면 닫혀 있지만, 구조를 보면 의외로 열린 곳이 많다. 실제로 핵심부품이나 자동화 설비처럼, 브라질이 스스로 채우기 어려운 지점을 정확히 짚은 기업들은 이 틈새를 마주했다.

관세는 어떨까? 많은 이들이 “관세가 높아 가격경쟁이 어렵다”라고 말한다. 물론, 브라질에 들어오는 순간 각종 세금이 붙으며 가격이 60% 이상 뛰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 말에도 분명 근거가 있다. 하지만 수입제품 최종 판매가에 포함된 세금 중 관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통상 4분의 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업세, 유통세, 사회보장기여세 등 내국세이며, 이는 현지 생산품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브라질에서 생산되지 않는 기술집약적 제품이나 혁신제품을 수입한다면, 관세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와 경쟁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공통의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격이 아니라, 무엇을 들여오느냐다. 기술력, 신뢰도, 대체 불가능성. 바로 그 지점에서 브라질 시장은 문을 연다.

브라질은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시장이다. 현장을 겪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맥락들이 너무도 많다. 책상 위에서 멀어질수록, 시장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보고서 뒤에 숨은 구조를 해석하고, 숫자 아래 눌린 흐름을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브라질이라는 시장은 '닫힌 곳'이 아니라 '해석 가능한 곳'이 된다.

해석되지 않았을 뿐 닫힌 시장은 없다. 보이는 브라질이 아니라, 부딪히는 브라질. 그곳에서 진짜 시장은 시작된다.

권준섭 KOTRA 상파울루무역관 관장 jakwon@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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