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간의 창작 기간을 걸쳐 완성된 박경리의 <토지>는 전체 5부 25편 362장(序 포함)으로 돼 있다. <토지>가 그리는 세계는 거대하다. 공간 스케일의 측면에서 1부 ‘평사리’에서 시작된 서사는 용정, 하얼빈, 러시아, 일본으로 국경을 넘어 확장된다. 1부 1장 ‘서희’로 시작한 이 대하소설의 인물들은 최치수와 윤씨 부인이 이끄는 최참판댁 일가와 주변의 양반, 평사리의 민중, 밀정과 독립운동가, 신여성과 기생, 지식인과 사상가, 자본가와 장사꾼까지 다양한 계층과 직업군을 아우르며 그 수는 600~700명에 이른다. 시기적으로는 구한말부터 해방 직전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근대를 포괄한다. 말 그대로 <토지>는 공간과 시간을 날줄과 씨줄 삼아 다양한 인물의 네트워크를 지리적·계층적·시간적으로 촘촘하게 직조해낸 거대서사(grand narrative)다.
이 글에서는 평사리를 배경으로 하는 1부와 용정을 비롯해 만주로 공간이 확장되는 2부를 다루기로 한다. 1부와 2부는 단순한 (여성) 가족사 연대기를 넘어, 한국의 근대 전환기에 중세적 봉건 질서의 붕괴와 식민지 자본주의의 유입,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촘촘하게 기록한 텍스트인 것이다. 또한 1부는 첫 장 ‘서희’의 등장으로 시작해 살인사건, 호열자(콜레라)와 같은 재난, 조준구의 탐욕과 강탈로 모든 것을 잃고 평사리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고, 2부는 서희가 용정을 기반으로 기민하게 재산을 일궈 평사리 사람들과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오는, 소위 출향과 귀향이라는 완결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계급과 젠더 가로지르는 원한의 텍스트
한편 <토지>는 음모와 살인, 공모와 야합, 사랑과 집착과 같은 격한 감정이 계급과 젠더를 가로지르며 소용돌이치는, ‘원한(resentment)’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제시한 ‘원한’은 강자에게 패배하거나 억압받은 약자가,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직접 복수할 수 없을 때 마음속으로 품게 되는 만성적인 복수심과 증오를 뜻한다.
<토지>의 인물들은 신분제와 식민 지배라는 이중의 억압 구조 속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원한을 품는다. 1부의 서사를 압도하는 것은 나중에 윤씨 부인의 아들 환이로 밝혀진 구천이 서희의 어머니 별당 아씨와 함께 도망을 간 일, 신분 상승과 재산 탈취를 목적으로 김평산, 칠성, 귀녀가 최치수를 살해하고 이 사실이 발각돼 사형당한 일이다. 월선과 용이의 순애보적 사랑, 주인을 섬기는 마을 사람들의 수동성을 압도하는 불륜, 강간, 협잡, 살인과 같은 사건들의 계열체는 조선의 봉건 체제가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원한에 찬 노예들이 이 체제를 전도시켰음을 의미한다. 이 악인들의 행동은 니체가 말하는 ‘노예의 도덕’과는 다르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을 약자들이 강자에게 직접 맞서지 못하는 상태에서 원한을 내면화하고, 강자의 힘과 위험을 ‘악’으로 규정하고, 약자의 유순함·동정·착함을 ‘선’으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토지>의 악인들은 도덕적으로 선한 노예의 위치에 있을 것을 거부한다. 이들은 원한을 내면화하지 않고 외부로 발산한다. 신분 상승에의 의지, 재산과 권력에의 의지를 실천하는 이들은 원한 감정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들로 인해 봉건 공동체는 더 이상 회복과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고, 이 파괴 뒤에야 근대 질서가 자리할 수 있게 된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귀녀’다. 귀녀는 칠성과 강 포수를 이용해 거짓 임신으로 최치수의 재산과 지위를 탐했으나, 강 포수와 결혼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듣고 평산과 짜고 살인을 감행한다. “귀녀는 백만석의 살림을 차지하는 야망보다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이 더 치열하였다.”(1부 2권 제3편 ‘종말과 발아’ 6장 ‘살해’ 중) 결국 귀녀를 움직인 것은 ‘노예’의 ‘원한’ 감정이다. 귀녀는 가부장제와 신분제가 여성의 상승 욕구를 차단했을 때, 어떻게 여성-괴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귀녀의 욕망은 봉건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의 상층부로 진입하려는 보수적 욕망이었기에 실패로 돌아가지만,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는 발연점이 된다.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으며, 그 균열 사이로 다양한 여성 주체가 솟아오른다. 최치수로 대변되는 남성 지배층의 병약성과 허무주의로 인한 몰락, 조준구나 김평산처럼 스스로 강자가 될 수 없기에, 강자에 대한 질투와 원한을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탐욕과 교활함을 생존술로 삼는 남성들의 반대편에 임이네와 귀녀가 보여주는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 빼앗긴 주인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서희의 차가운 통치술이 자리한다.

<토지>의 여성들은 단일한 피해자로 머물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그 모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파괴하는 행위자(Agent)로서 기능한다. 남성 인물들이 이념이나 명분에 갇혀 몰락할 때, 여성들은 변화하는 현실에 발 빠르게 적응하고 생존술을 익힌다. 윤씨 부인과 최서희는 가문의 수호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지만, 이를 수행하는 방식과 내면의 동력은 판이하다. 윤씨 부인은 최참판댁의 실질적인 지배자지만, 가부장제의 규범을 자신에게 가혹하게 적용하는 인물이다. 윤씨 부인은 동학 장수 김개주에게 겁탈당한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신의 부덕과 죄로 인식한다. 그는 최치수와 구천(김환) 모두에게 온전한 모성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이를 엄격한 가문의 규율 준수로 보상하려 한다. 냉철한 경영 능력은 탁월하지만, 그것은 최씨 문중의 고공살이라는 자기 비하적 인식하에 수행된다. 윤씨 부인은 남성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주체성을 억압한다. 호열자로 인한 그의 죽음은 구체제의 도덕을 대행하던 세대의 비극적 퇴장을 알리며, 서희라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예고한다.
한 여성의 성장을 넘어 입법자의 형상
최서희는 윤씨 부인의 죄의식을 계승하지 않는다. 서희는 조준구에게 가문과 재산을 빼앗기고, 고귀한 신분에서 바닥으로 추락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는 가련한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친일파로 오인을 받으면서도 빼앗긴 토지와 재산을 되찾기 위해 냉혹하게 재산을 모으고, 오랜 시간에 걸쳐 치밀하게 복수를 설계한다. 서희에게 원한은 파괴적 감정이 아니라 자본 축적의 원동력이 된다. 그는 길상과의 결혼을 통해 스스로 아씨와 하인이라는 주인-노예의 위계도 무너뜨린다. 서희의 욕망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돈’과 ‘토지’로 치환된다.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경제력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이라는 젠더적 한계를 ‘자본가’라는 새로운 계급적 정체성으로 돌파한다. 2부 마지막에서 그는 용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평사리 사람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환한다. 평사리 사람들을 이끌고 간도 용정으로 가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 도리를 마련해 주고, 이들을 다시 거느리고 귀환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순히 한 여성의 성장이 아닌, 새로운 규칙과 가치를 창조하는 ‘입법자’의 형상을 보게 된다.
<토지> 1부와 2부는 구시대의 몰락과 근대의 도래가 맞물리는 격동의 시기를 젠더와 욕망, 원한이 교차하는 인물들의 인드라망(모든 존재가 상호연결된 한 생명이라는 의미의 불교 용어)으로 그려낸다. 최치수와 조준구가 보여주는 허약하거나 교활한 남성성이 무너진 자리에 여성들이 등장한다. 귀녀는 왜곡된 신분 상승 욕망으로 파멸하면서도 구체제에 균열을 가져왔고, 임이네는 도덕을 폐기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체화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했다. 최서희는 원한 감정을 동력으로 삼아 최씨 가문뿐만 아니라 평사리 공동체를 재건하는 주체가 된다. 따라서 서희를 가문을 유지하려는 낡은 봉건 질서의 수호자로 보고, 이를 작품의 한계로 규정하는 기존의 페미니즘 독법은 재고돼야 한다. <토지>가 보여주는 젠더 정치학의 핵심은, 여성들이 수동적인 피해자에서 벗어나 욕망의 주체, 경제의 주체 그리고 생명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다. 이런 <토지>의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은 3~5부를 이끄는 서희 이후 세대 신여성들의 다양한 행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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