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죠, 우리는 세상 곳곳에 있는데요

2025-07-09

제26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렸던 지난달 14일은 하루종일 비가 올 거라고 예보된 날이었다. 걱정이 무색하도록 하늘이 맑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풍경은 예뻤지만 정말 더웠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열기와 함께 습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 참가자의 투덜거림을 듣고서는 ‘웃참’에 실패했다. “아니 나는 퀴어 당사자니까 왔는데, 이 날씨에 여기에 오는 앨라이(성소수자들의 지지자)들은 진짜 대단하다.” 퀴어퍼레이드 단골 참가자들은 ‘퀴퍼 날은 항상 덥다’고 입을 모은다. 그럼에도 이들이 매년 거리에 나오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성소수자 집단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기 때문이다.

퀴어 당사자는 아니지만 퀴어퍼레이드에 갔던 것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사상 처음으로 차린 공식 부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언론의 성소수자 관련 보도가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지 않도록 하고, 퀴어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현장을 안전하고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취지라고 이해했다. 매달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으로서 반갑고 기뻤다.

무지개색 부채와 귀여운 병따개 ‘굿즈’를 나눠주며 부스를 방문한 사람들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언론노조 부스에서는 ‘최악의 성소수자 보도 헤드라인 고르기’ ‘언론에 바라는 점 포스트잇 붙이기’ 행사가 진행됐는데, 스티커를 붙이는 판에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몰렸다. 방문객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긴 줄을 서길 마다하지 않았다.

빼곡하게 붙었던 포스트잇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을 옮겨보면 이렇다. “어떡하죠, 우리는 세상 곳곳에 있는데요” “나의 존재는 너의 기삿거리가 아니다” “그냥 다 같은 인간으로 보세요” “인권 앞에 기계적 중립은 없다” “혐오의 확성기가 되지 마세요”. 누군지 모를 동료들의 메시지도 있었다. “방송국에도 퀴어 많아요” “커밍아웃하고 싶어요. -현직 기자-”. 이날 참가자들이 최악의 헤드라인 1위로 꼽은 제목은 ‘“동성애 막아내는 방파제 되자” 20만명 서울 도심서 함성’이었다. 이날도 개신교계 단체들은 어김없이 ‘동성애 반대’ ‘동성애 싫어요’ 등의 팻말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모든 인간이 동성애를 택했을 때 인류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김민석 국무총리의 2023년 발언이 알려진 것은 공교롭게도 퀴어퍼레이드 다음날이었다.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동성애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비판할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게 근거였다. 어제 동성애 축제에 다녀왔으니 이제 나도 분위기를 따라 동성애자가 되는 건가. 이렇게 이성애가 판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는 동성애자들에게는 도대체 왜 이성애가 확산되지 않는 걸까. 동성혼을 허용한 국가들 중에 한국보다 출생률이 낮은 나라가 없던데….

시답잖은 생각이 꼬리를 무는 와중에 그가 다음날 외신기자간담회에서 했다는 발언에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다. 김 총리는 “차별금지법을 본인의 인권과 관련해 절박하게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고, 자신의 개인적이거나 종교적인 신념에 기초해서 차별금지법을 비판할 때 자신이 처벌받는 것 아닌가 하는 절박한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며 “이 두 가지 본질적인, 헌법적 목소리에 대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회에 제출됐던 법안 중 ‘차별금지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내용이 있는 법안은 없으니 사실관계부터가 틀렸다. 다 떠나서 ‘특정 집단을 차별할 자유’라는 것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에게 부여된 헌법적 권리라고 볼 수는 없다.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어떤 국회의원도 여기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한 글로벌 리서치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성소수자 비율은 약 6%라고 한다. 유권자 중 6%를 계산하면 약 266만명으로 대구광역시 인구보다 많다. 이 정도 규모의 유권자 집단이 ‘가시화되지 않은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시당했을지 의문이다. 김 총리는 취임식에서 “사회적 약자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구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사회적 약자에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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