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에 동학농민혁명 선열을 생각한다

2024-06-23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서훈 요구는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를 비롯한 40여 개의 각 지역 기념사업단체를 중심으로 수년간에 걸쳐 진행되어왔다. 그 성과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윤준병 의원의 특별법 개정 발의로 소관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였으나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은 관련 전공 역사학자들은 물론 각종 언론을 통해 서훈의 타당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제자리 걸음이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참여자의 서훈 문제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때부터 제기되어 30년을 끌어온 문제이다. 얼핏 생각하면, 조선왕조의 때의 사건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자는 주장이 타당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두 가지 법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농민군의 서훈이 관련 법률의 취지와 서훈 기준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은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을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라고 명시하고 있다(법 제 4조). 이 기준에 따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는 명백하게 일본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 근거는 전봉준의 심문기록을 비롯한 많은 역사자료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부는 몇 차례에 걸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서훈 신청에 대해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둘째는 1894~5년 의병운동 참여자와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금년 3월 말까지 1895년 이후 의병운동 참여자로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인물은 2,722명이나 된다. 또한 최근 의병 연구 결과에 의하면 1894년에도 의병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들 또한 독립유공자로 신청된 바 있다. 1894년 의병운동은 일본군이 경복궁 무력으로 점령하고(6월) 국왕을 감금한 상태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한 사실 때문에 몇몇 지역에서 의병이 봉기하였고, 이에 더해 이듬해 일본군의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본의 국권침탈 반대운동이었던 의병운동과 동학농민혁명 항일운동을 법적으로 차별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울러 항일운동의 규모로 보면 의병운동은 수백 명에서 많은 경우 수천 명에 이르지만, 동학농민군의 항일전 규모는 수만 명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 2차봉기 참여자의 서훈 문제를 논의하는 토론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그때마다 서훈에 반대하는 주제발표나 토론자를 물색하였으나, 이에 응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서훈에 반대하는 언론기고문이나 인터뷰 기사도 찾기 어렵다. 이는 농민군에 대한 서훈 반대론이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다만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몇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반대론이 제기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공적심사의 난처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동학농민혁명 폐정개혁안을 대한민국 헌법의 기원이 되는 원시헌법 문서라는 연구논문까지 발표되고 있는 터에 농민군의 서훈 문제는 이제 사법적 판단을 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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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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