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다. 올해가 곧 작년이 된다니.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시간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게 흐른다. 그래서 더 진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12월을 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뭘 해야 2024년이 더는 올해가 아니게 되더라도 후회가 없을지.시끄럽고 복잡하게 흘러간 해지만 늘 그랬듯 새로운 것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정했다. 올해가 여전히 올해일 때 2024년에 문을 연 공간에 다녀오기로. 기왕이면 최초라거나 최대와 같은 수식어가 달린 곳이라면 더 재밌지 않을까.
최초
오디움에서 역사를 듣다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고 차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오디움(Audeum)이 제격이다. 오디오(Audio)와 뮤지엄(Museum)의 합성어를 이름으로 삼은 오디움은 지난 6월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오디오 박물관이다. 오디오에 깊은 애정을 가진 KCC 정몽진 회장과 고(故) 최봉식씨의 수집품들로 채워진, 성공한 ‘덕후’의 공간이기도 하다.
300여 세트의 오디오 시스템과 뮤직박스 등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빈티지 오디오 컬렉션에 오디움은 개관 전부터 관심을 모았다. 거기에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한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를 맡았으니 기대가 커질 수밖에.
오디움을 둘러싼 2만개의 알루미늄 파이프는 숲을 상징한다. 좋은 소리를 자연과 같은 공간에서 듣게 하기 위함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수많은 파이프와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공기는 잔잔하고 소음 없이 고요하다. 예약을 확인하는 안내 직원의 말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그마저도 많지 않다.
오디움은 일주일에 단 3일, 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사전 예약자에게만 개방된다. 그런데 예약이 쉽지 않다. 회차당 25명씩 하루 125명만 관람할 수 있기에 경쟁이 치열하다. 자유 관람도 불가하고 투어 중 개별 이동도 어렵지만 예약에 성공한 후엔 쾌감이, 입장한 후엔 감동이 기다린다. 도슨트 투어에서는 오디오에 대한 설명은 물론 청음회도 진행되기 때문이다.
오디오 기기는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시대별로 전시 중이다. 특이한 건 관람 순서가 1960년대에서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정 회장이 사랑하는 ‘웨스턴 일렉트릭’사를 메인으로 1950년대의 하이파이 사운드 시스템, 1930년대 영화관에서 사용된 커브 혼 스피커, 19세기 말 에디슨의 축음기와 뮤직박스까지 역으로 오디오 기술을 탐험한다.
탐험은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소리로도 이어진다. 시대별 오디오로 한 곡 혹은 두 곡의 음악을 듣는 시간이 준비되어 있다. 각 오디오마다 잘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있는데, 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를 들려준다. 의자에 앉아서, 벽에 기대서, 빈 공간에 서서 듣는 김광석, 백지영, 비틀스의 목소리가 귀와 마음을 울린다. 간혹 훌쩍이는 소리도 들린다.
깊은 여운을 안고 투어의 마지막 장소인 라운지에 도착하면 30분 동안 마지막 청음회가 시작된다. 10만장이 넘는 바이닐 레코드와 1만장 이상의 CD로 둘러싸인 것만으로도 압도적인데, 그 공간을 음악이 가득 채운다. 소리가 주는 전율이 놀랍다. 라운지 가운데 놓인 100년 넘은 뮤직박스는 하루 한 번, 1회차에만 작동한다. 다시 치열한 예약 경쟁에 뛰어들 이유가 생겼다.
오디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전시 이름은 <정음(正音): 소리의 여정>이다. 오디오 컬렉션으로 시대의 소리를 들으며 좋은 소리를 찾고 탐구한다는 의미다. 듣기 싫은 소리도 견디며 한 해를 무사히 잘 보낸 나에게, 해가 저물기 전 좋은 소리를 선물해 보자. 새해라는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커다란 위로가 될 테니.
최대
아르떼에서 영원을 보다
연말이라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커진다면 그에 어울리는 화려한 빛의 향연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아르떼뮤지엄은 몰입형 미디어아트를 선보이는 우리나라 대표 전시관이다. 2020년 9월, 제주를 시작으로 2021년에 여수와 강릉에 개관하며 몰입도 높은 초대형 미디어아트를 선보였다. 중국과 미국, 두바이까지 진출한 아르떼뮤지엄은 현재 국내외 총 8개.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하는 곳이 바로 부산이다.
아르떼뮤지엄 부산은 거대한 창고처럼 생겼다. 당연하다. 실제로 선박 수리 공장이었던 공간이 전시관으로 재탄생했으니. 총면적은 5600㎡(약 1700평). 전 세계 아르떼뮤지엄 중 최대 규모다. 관람객 수는 개관 한 달 만에 12만명을 돌파하며 부산 영도의 ‘핫플’이 되었다.
‘영원한 자연(ETERNAL NATURE)’이라는 공통 주제를 담은 아르떼뮤지엄 부산의 작품 수는 총 열여섯 편이다. 계속 순환하는 금빛 모래 ‘서클(CIRCLE)’을 시작으로, 때로는 무한히 또 때로는 압도적으로 빛의 세상이 펼쳐진다. 그 형태도 다양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였다가, 쉬지 않고 몰아치는 파도가 되고, 거대한 빙하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대형 화면만 이어지면 질려버릴 텐데 작품 배치는 강약을 넘나든다. 거기에 청각, 후각, 촉각도 챙긴다. ‘플라워(FLOWER)’에서는 강렬한 장미 향과 함께 끝없이 꽃잎이 휘날린다. 숨을 들이쉬면 꽃향기가 나고, 눈을 감으면 새소리가 들리고, 눈을 뜨면 장미가 흩날리는 사랑과 낭만의 공간이다. ‘레인(RAIN)’에서는 온몸으로 비를 맞았고, ‘라이브 스케치북(LIVE SKETCHBOOK)’에선 직접 그린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걸 보았다. 오감만족의 현장이다.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지는 작품도 있다. 시드(SEED) 관의 ‘히비스커스(HIBISCUS)’는 최초로 무궁화를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다. 수십 개의 화면에서 씨앗이 태동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자라나 한 송이 무궁화를 활짝 피워낸다. 끝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의 강인함과 영원히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이다. 씨앗과 세포의 움직임에 맞춰 장엄한 악기 소리도 들린다. 둥~ 두둥~ 하는 소리가 심장 소리를 닮았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부산이다. ‘스태리 부산(STARRY BUSAN)’은 다이내믹, 버라이어티, 드림의 콘셉트에 따라 역동적이고 정겹고 반짝이는 부산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준다. 모든 장면을 놓치기 아깝지만 불꽃이 터질 땐 그야말로 황홀하다. 벅차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축하와 응원 같기도, 새로운 희망 같기도 하니까. 영원한 건 없다지만 이곳에 분명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니 곧 다가올 한 해의 끝이 아쉽다면 떠나보자, 부산으로.
전통을 담다, 대구 간송미술관
2024년 새로운 여행지에서 대구 간송미술관(사진)이 빠지면 서운하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일제강점기,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물을 모아 지킨 간송 전형필 선생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보유한 국보만 11점, 보물은 22점이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올해 9월, 대구미술관 옆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으로 국보와 보물을 선보인 전시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는 3개월간 진행됐다. 김홍도, 신윤복, 정선 등 교과서에서나 봤던 이들의 작품을 선보였고 수많은 이들이 대구로 향했다. 누적 관람객 수는 22만명 이상이라고.
전시는 12월1일에 막을 내렸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내년 1월15일까지 휴관 후 새로운 전시로 찾아올 예정이기 때문. 대구 간송미술관은 간송미술관의 유일한 상설 전시공간이다.
1년에 단 두 번, 봄과 가을에만 잠깐 관람을 허락하는 간송미술관과 달리 상시로 미술관 소장품을 만날 수 있다. 그 취지를 살려 상설전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그러니 올해 가지 못한 아쉬움은 가는 해와 함께 흘려보내고, 새해 새 여행의 목적지로 삼아보자. 내년에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벌써 2025년이 기다려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