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별다른 내용 없이 인물들끼리 대화하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이주란의 장편소설 <수면 아래>(2022, 문학동네)는 실없는 대화로 가득하다. “어떻게 지냈어요?” “그냥 평범하게 지냈어요.” “어려운 거네요.” “뭐가요?” “평범하게 지내는 것.” “유진씨는요?” “저도 그런 편이에요.” “좋네요.” 특별한 정보가 오가지는 않지만 두 사람은 분명히 안부 이상의 무언가를 나누고 있다. 평범하게 지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 보면 힘든 시간을 보낸 모양이지만 아무도 구체적인 사정을 캐묻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는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일상에서는 마치 없는 일처럼 취급되는 대화도 소설에서는 하나의 사건이다.
소설에서만 그런가. 올해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불리는 ‘하데스 Ⅱ’(슈퍼자이언트 게임즈, 2025)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배경으로 삼은 액션 로그라이크 게임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악몽의 화신 멜리노에가 할아버지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지하로 떠난다. 많은 게임에서 그렇듯 죽음은 필연적이다. 플레이어는 전투를 거듭하면서 죽음을 반복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본거지로 돌아와 무기를 강화하거나 마법을 업그레이드하는 식으로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런데 내가 한 번의 러닝을 끝내고 얼른 죽고 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죽을 때마다 NPC와의 새로운 대화가 해금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너무 궁금해서 일부러 빨리 죽어버린 적도 있었다.
‘하데스 Ⅱ’는 멜리노에가 크로노스와 전쟁을 치르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올림푸스의 신, 저승의 신, 지상의 영웅을 비롯한 주변 캐릭터와 관계를 맺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당 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어떤 캐릭터가 왜 그렇게 호전적이거나 상냥한지, 과거에 누구와 사귀거나 왜 싸웠는지는 일일이 대화를 나눠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어마어마한 양의 스토리를 품고 있으면서도 막상 한 번의 대화는 두세 마디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죽음 루프를 끝내고 그 캐릭터를 다시 만나야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이렇게 짧은 대화의 반복만으로 플레이어는 NPC와 점차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테면 불화의 신 에리스는 처음에 투덜거리면서 멜리노에의 여정을 방해하지만 가벼운 대화가 드문드문 되풀이되면서 둘은 서로에게 불나방처럼 이끌려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악몽이 불화에 이끌린다니, 참 말이 된다.) 관계라는 것은 사소한 접촉과 별거 아닌 말들이 누적되면서 열리는 것일까.
게임에서만 그런가. 인류학자인 말리노프스키는 ‘원시 언어에서 의미의 문제’(1923)라는 논문에서 이를 ‘패틱 소통(phatic communication)’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정보나 가치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관습적인 인사말을 교환하면서 사회적인 유대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스몰토크 혹은 잡담이라고나 할까. 이를 두고 내용 없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함께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대단한 감정을 해소하거나 특정한 목표를 향해 진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위해서. 그런 대화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상대방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잘 있구나.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구나. 그러나 때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대화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이미 하나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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