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경향] 한국의 농촌은 ‘소멸위기’라는 말을 달고 산다.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축제를 열고, 출렁다리를 놓고, 벽화를 그리고, ‘농촌 스테이’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도시 사람들을 유인하려 애쓴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이 이주하면 집과 정착금을 주고, 대학 장학금까지 내거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농촌 소멸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농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유럽의 국가들도 같은 숙제를 안고 있다. 한국에 비해 사정은 낫지만, 농촌 인구는 줄고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된다. 지난 3월 30일부터 4월 15일까지 공익재단인 대산농촌재단의 유럽 3개국(네덜란드·독일·프랑스) 농업연수 프로그램에 동행한 주간경향은 지난 호에 이어 유럽 농촌의 도전과 실험을 소개한다.
이번에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두 마을 ‘후글핑(Huglfing)’과 ‘빌트폴츠리트(Wildpoldsried)’ 이야기다. 인구 3000명도 채 되지 않는 ‘게마인데’, 우리 식으로 치면 읍이나 면 정도 되는 마을이지만, 이곳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마을 주민들은 어떤 방식으로 농촌을 재생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을까?
돌봄과 환대의 공간 ‘후글핑’
지난 4월 7일(현지시간) 후글핑 마을을 찾았다. 낙농업 하는 중소규모의 가족농과 수공예 장인들이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는 놀이터를 만들어놨는데 규모가 상당히 컸다. 집라인(Zipline), 밑에 터널 공간이 있는 정자, 건물 2~3층 높이의 미끄럼틀과 유아용 미끄럼틀 등 놀이기구 18개가 설치돼 있었다.

마을의 면장(뷔어거마이스터)인 마르쿠스 후버는 “주민들이 만든 놀이터”라고 했다. 2021년 마을에 아이들이 놀 공간이 많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그해 방학 기간에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워크숍’이 열렸고, 아이들과 청소년, 부모들이 어떤 놀이터가 필요한지 아이디어를 냈단다.
놀이터는 2023년 7월에 45만유로(약 7억원)를 들여 완공했다. 주 정부의 지원은 29만유로(약 4억5000만원)였고, 나머지는 후글핑 마을 예산과 주민들의 자원봉사로 채웠다. 면장은 “후글핑 주민들과 어린이, 청소년,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가 여기에서 함께 작업했다. 주민들의 자원봉사 시간을 더해 보니 2000시간이나 됐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치면 ‘시청’ 혹은 ‘면사무소’ 격인 행정청사(라트하우스)는 과거 학교로 썼던 건물을 고쳐서 사용한다. 이 마을은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도 최대한 원래 모습을 유지토록 한다. 폐가 처마 밑에 있던 격자무늬 나무 장식(분트베르크) 등은 최대한 남겨서 새 건물 지을 때 활용한다. 100년 넘은 집이 많고, 중세 시대 지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이 마을의 전통과 특색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다.


후글핑에도 자녀는 독립하고 배우자는 사망해 혼자 사는 노인이 많다. 2010년대 초 독거노인 문제가 제기되자 마을이 나섰다. 계단 등의 장애물을 없앤 ‘공동체 주택’을 새로 짓고, 60세 이상 노인과 장애인들이 살도록 했다. 공동체 주택 앞에는 주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를 지었다.
이날은 커뮤니티 센터에서 노인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뜨개질과 자수를 하는 수공예 모임날이었다. 올해로 10년 된 모임이란다. 이 모임의 회장인 한네 슈나이더는 “전통 수공예 방식으로 레이스 장식을 만들고 있다”며 “이게 우리 노인들에겐 ‘요가’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커뮤니티 센터 맞은편에는 유치원이 있었는데, 어르신들은 창밖으로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을 보며 손을 놀렸다. 면장은 “노인이 있는 곳에 어린이도 함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애들 노는 소리로 시끄럽잖아요. 어르신들 낮잠 주무시긴 틀렸어요. 다행인 건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집에 가니까 그땐 이 분들도 편히 쉬고 주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커뮤니티 센터에서는 매달 한 차례 ‘이웃 돕기 협회’ 회원들의 모임도 열린다. 후글핑 주민들과 이웃 마을인 오버하우젠 주민들이 2022년 만든 모임이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다.


2023년 후글핑 마을은 독일 연방식품농업부가 3년마다 개최하는 ‘우리 마을에는 미래가 있습니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탔다.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인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가꾸는 주민들에게 주는 상이다.
2006년까지만 해도 이 경연대회의 이름은 ‘우리 마을은 아름다워져야 합니다’였다. 하지만 농촌 마을의 미화 사업이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고, 도시 사람들을 위한 관광 사업으로 변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독일의 한 방송사는 경연대회를 비꼬아 ‘우리 마을은 추해져야 합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경연대회는 미화 중심의 평가에서 지속 가능성, 주민 참여, 지역 정체성, 경제적 자립성, 사회적 포용력 등 마을의 ‘미래 가능성’을 포괄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꿨다.
후글핑에는 작은 기차역이 있는데, 20년 전 철도청이 기차역사를 매물로 내놨을 때 마을에서 사들였다. 역사 1층에 주말에만 운영하는 마을 카페를 만들고, 공유 오피스도 두었다. 역사 다락 공간은 난민 가족에게 내줬다.
후글핑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 15명 등 총 30명의 난민이 거주한다. 독일은 주 정부가 일정 수의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데, 후글핑이 바이에른주의 난민 일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난민을 대상으로 한 사회복지, 상담, 교육 서비스 등을 지역 사회가 담당하기 때문에 난민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주민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후글핑은 주 정부 지원을 받아 난민들을 위한 주택을 새로 짓기로 하고, 향후 15년간 난민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한 뒤 주민들을 위한 공동체 주택 시설로 전용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이뤄냈다.
후글핑은 마을의 오래된 건물을 여러채 사들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임대주택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역사 근처에 있는 학교를 신축하는 프로젝트도 기획하고 있다. 마을이 나서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운용하다 보니 자녀가 있는 젊은 가족도 많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후글핑 주민 2864명 중 17세 이하가 575명(20.1%)이다.

행정청사 1층은 면장과 마을의회 의원(게마인데라트)들의 회의 공간으로 쓰인다. 큰 유리창으로 돼 있어 외부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주민들은 일부 비공개회의를 제외하고는 언제든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독일에선 면장 등 기초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6년마다 있는데, 마르쿠스 후버 면장은 올해가 5년째다. 재선에 성공하려면 항상 주민들과 얘기 나누고 의견을 들어야 한다.
“주민들이 면장 만나려면 약속을 잡아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다들 그냥 아무 때나 오세요. 마을의 여러 문제에 대해 얘기해 주시죠. ‘이웃이 차를 잘못 주차해요’ 같은 작은 문제부터, ‘생활할 돈이 없어요’ 같은 큰 문제까지···. 저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예요.”
순환과 지속의 공간 ‘빌트폴츠리트’
후글핑에서 동쪽으로 50㎞ 떨어진 곳에 있는 빌트폴츠리트는 주민 2698명(2024년 4월 기준)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중소 규모의 가족농으로 이뤄진 낙농업이 주산업인데, 최근에는 재생에너지 산업으로 더 많은 돈을 번다. 마을 주민들은 에너지를 팔아 그동안 연간 400~700만 유로(약 63억~109억원)의 수익을 냈다.
지난 4월 7일 이 마을을 찾았다. 마을 서쪽 구릉지에 11개의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장 빠르게 추진 중인 독일에서조차 농촌 마을에 들어선 풍력발전기는 ‘흉물’로 통한다. 희고 길쭉한 풍력발전기가 빼곡히 들어선 지역에 대해서는 ‘아스파라거스화(Verspargelung)’됐다고 비꼬기도 한다. 그런데 빌트폴츠리트에서는 주민 반대 없이 어떻게 발전기가 11개나 세워질 수 있었을까.

마을의회 의원인 토마스 플루거는 “이들 풍력발전기의 가장 특별한 점은 모두 빌트폴츠리트와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베를린이나 뮌헨 같은 대도시에 있는 외부 투자자들은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이 지역 주민들만 투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출자해 회사나 협동조합을 세우고 부족한 자금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풍력발전기를 설치한다.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풍력발전 설치에 대한 지역 반발을 잠재우는 핵심이었다는 얘기다.
가장 오래된 발전기가 2000년에 만들어졌고, 가장 최근에 지어진 발전기가 2016년에 세워졌다. 앞으로 오래된 풍력발전기 3기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추가로 4기를 더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토마스 플루거는 “풍력발전소 수명이 보통 30~40년이고 우리는 연간 10%씩 배당금을 받기 때문에 약 10년이면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 이후부터는 순이익만 발생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풍력발전뿐 아니다. 이 마을은 모든 자원을 에너지로 바꾼다. 2000년대 초부터 집마다 지붕 위에 태양광 패널을 올리기 시작했다. 행정청사 지하에는 마을의 공공기관과 주택 등에 80~90도의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대형 보일러가 있는데, 이 보일러는 목공소에서 나온 목재 부스러기를 압축해 만든 ‘펠릿’을 태워 물을 데운다. 마을 외곽에 있는 축산 농가에서도 축분에서 나온 메탄가스를 태워 전기와 열(온수)을 생산해 마을에 공급한다.


마을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10배를 생산하면서, 남은 전력을 판매해 얻은 이익은 다시 지역사회에 재투자된다. 마을의 스포츠 동호회는 마을 체육관을 직접 관리·운영하는데, 체육관 지붕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한 전력을 판매해 운영 자금으로 활용한다.
빌트폴츠리트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토마스 플루거가 말했다. “몇몇 주민들이 비전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면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죠. 이런 요소들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초창기 사업을 주도한 주민 중 한 명은 2008년 마을의회 의원으로 선출됐고, 지금은 부면장(츠바이터 뷔어거마이스터)을 맡고 있다. 에너지 자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전임 면장은 1996년부터 2020년까지 네 번이나 연임할 정도로 주민들의 지지가 높았다. 마을의 행정과 의사결정 시스템, 주민 참여가 선순환하며 이 마을을 바꿔놨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선 주민들이 함께 해답을 찾는다. 후글핑과 빌트폴츠리트는 ‘돌봄과 환대의 공간’이자 ‘순환과 지속의 공간’이다. 도시민을 유치하기 위한 일회성 투자보다는,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한 결과다. 우리 농촌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