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여성들, 자립에 눈떠… 남성에 종속 거부 늘어” [차 한잔 나누며]

2025-05-13

‘여자는 죽지 않았다’ 낸 탈북작가 설송아

北 신흥 부유층… 자전 에세이

“생계 위해 장사 뛰어든 여성들

사회주의 체제에 큰 염증 느껴

김정은, 젠더정치로 女 도구화

운전 불허·이혼하면 감옥 보내

여성 가치 재창조 주목 자부심”

“한국에서는 북한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재창조하는지 주목한 적이 없죠. 탈북민으로서 이것을 최초로 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북한 시장에서 발현된 여성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북한 사회를 조명한 신간 ‘여자는 죽지 않았다’를 쓴 작가 설송아(본명 최설)씨는 출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을 보는 시선은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인권 문제 등에 쏠려 있는데, 누군가는 북한 여성에 대해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다. 북한 여성을 보면 그 안에 북한 정치, 사회, 경제 문제가 다 들어있다는 설명이다.

북한 경제를 분석하는 연구원이자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 기자, 강사 등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설씨를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평안남도 출신으로 2011년 한국에 입국한 그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자로서는 또 다른 활동명을 쓴다.

2024년 통일부 남북통합문화 콘텐츠 공모에 선정된 그의 책은 북한 장마당에서 신흥 부유층으로, 여성 사업가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 한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설씨의 자전적 에세이다. 책에서는 사회주의 북한에서 자본주의 시장이 어떻게 태동하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이러한 변화를 견인한 여성들이 자립과 주체성에 눈뜨게 되면서 ‘남성 권력’에 종속되는 운명이 여성의 숙명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1991년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로 인해 북한에서 시작된 심각한 경제난은 1995년 최악의 시기를 맞이했다. 식량과 생필품 등 국가공급체계가 무너지며 부각된 ‘고난의 행군’ 속에 여성들은 가정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장사에 뛰어들었다. 설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페니실린, 제빵 등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어 낸 그는 전국 단위로 시장을 확장해 큰 돈을 벌었다. 2005년 당시 5급 교사이던 남편 월급이 2500원이었는데, 그 혼자 하루에 5만원을 벌 정도였다.

​ 설씨는 “국가가 생산설비와 토지를 독점하고, 공장과 농장에서 생산된 필수품과 식량을 주민에게 공급해 온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1994년 김일성 사후 장마당이 등장하고 붕괴되었다”며 지금은 국영공장 설비를 개인이 임대해 생필품을 만들어 전국 장마당에 공급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려면 국가 세원으로 기능하는 장마당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 김정은 정권의 ‘모순’이라는 지적과 함께다.

‘자력갱생하라’는 당의 방침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당국은 장마당 주체인 여성을 주목한다. 여성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고 정치화하면서 남성을 보좌하는 경제 기능자로서의 여성성을 고착화한다. 이는 수령제 사회를 뒷받침하는 가부장제 근간이 밑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젠더 정치’에 대해 설씨는 “여성을 인정해주되 그 방식은 선대수령과 달리 전략적”이라고 진단했다. 아들이 있음에도 딸 김주애를 내세우는 것은 ‘여성을 중시하는 최고 지도자’ 이미지를 내세워 장마당 여성을 활용 및 통제하려는 행보라는 분석이다. 역사상 처음 ‘어머니 날’이 제정(2012년 11월16일)된 데 이어 어머니 대회와 인민반장 대회를 여는 것 등도 비슷한 맥락이다.

설씨는 “이제 여성을 무시하고는 민심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김정은 위원장은 국가의 남성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할 효과적인 수단이 장마당 여성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며 “진짜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속내는 북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설씨에 따르면 이제는 북한에도 장사하는 남성이 늘고 있는데, 상당수가 고수익을 창출하는 물류·유통업에 진출했다. 이는 정책적으로 북한 여성에게 운전면허 기회가 원천적으로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려면 반드시 수반되는 이동을 자전거에 의존했던 북한 여성들은 이조차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설씨는 이에 대해 “2006년쯤 북한에서 자전거 타는 여성은 조선여성의 고상한 품성이 아니라며 강력히 통제하라는 방침이 내려온 적이 있다”며 “남성 전유물로 여겨진 자전거가 여성에게 넘어가자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됐고, 여성의 사회화를 제한하려는 시도로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황당한 단속은 자전거를 빼앗겨 일생 동안 갚지 못할 빚더미에 앉을 위기에 처한 한 여성 교사가 70미터 높이의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일을 계기로 사라지게 된다.

설씨는 책에서 장마당 여성들이 이 교사의 동상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한 대화를 소개하면서 “깨어난 여성들은 이제 수령의 신격화에 문제를 제기하며 동상의 가치를 논의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우상화된 김일성, 김정일이 아니라 자살로 공권력에 도전한 여성이야말로 동상을 세워 기념해야 할 존재가 아니냐는 각성의 순간이었다.

이는 20세기초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을 벌이던 서프러제트(suffragette) 여성 에밀리 데이비슨의 순교를 연상케 한다. 달려오는 국왕의 말에 몸을 던져 사망한 페미니스트를 통해 영국 여성의 참정권 논의가 진전된 것처럼, 북한에서도 이후 자전거는 여성이 경계를 넘어서는 변화의 상징이 됐다.

“장마당 수업으로 배운 이치가 그러했듯, 경험으로 깨친 진실은 결코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에 대한 아내의 공경을 의무화하는 로동당의 사상사업이 지속되니 깬 여자들에게 남편의 존재는 로동당의 상징으로, ‘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무엇을 성취하든 여자라는 이유로 원천적으로 눌려 있다면 남편은 나를 여자로 묶어두는 존재,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없게 하는 장벽인 것이다.”

- ‘여자는 죽지 않았다’ 중 (p.210)

장마당에서 여성의 활약이 커질수록 북한은 ‘남성의 위상 살리기’에 고민하는 모습이다. 일례로 지난해에 세대주로 호명되는 남성들이 국영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20배가량 올렸다. 1800∼2000원 받던 노동자 월급이 5만원이 됐다. 설씨는 “노동자 월급 인상 차원이 아니고 남성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함”이라며 “여성이 가정의 생계를 움직이는 상황에서 남성의 위상이 내려가니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보는 것”이라 했다.

이로 인해 가정에서도 성별 간 충돌이 불가피해지면서 이혼하는 부부가 증가하자 북한은 지난해부터 이혼하면 무조건 감옥에 보내는 극단적인 정책까지 도입했다. 설씨는 “여성의 종속을 제도화하려는 이런 시도가 계속되면서 이를 오히려 문제로 보는 여성들이 많아졌다”며 “이제 결혼하더라도 등록을 안하고, 아이도 당연히 안 낳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빠르게 변화한 북한 여성들의 인식, 사회적인 의식을 국가의 가장인 최고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남성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큰 틀에서 성별 간의 이러한 의식 분화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국가가 딱 묶어놨잖아요. 공교육에 의한 혁명 사상으로 뭉쳐 있죠. 반면 여성은 자꾸 돌아다니고 자본주의 시장의 교육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변하고 있어요. 그러니 남편이 답답한 거예요. 사회주의 시대에 결혼해서 자본주의 시대에 부부의 삶을 살고 있는데, 남편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에요. 대화가 안 통할 밖에요.”

이번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서두와 말미를 수미쌍관으로 장식한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일화다. 북한에서 왕두살이(드센 여자) 취급을 받던 그는 한국에 와서 ‘걸크러시’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다 자신에게 어떤 교수가 “페미니스트죠?”라고 물은 것을 계기로 여성주의자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됐다.

페미니즘의 피읖 자도 모르던 설씨는 40대 중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인생이 곧 페미니즘이었음을 깨닫고 “깊은 연못에 풍덩 빠지듯 (페미니즘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초안 제목도 ‘북한 페미니즘, 사회주의를 흔들다’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여성의 발목을 잡는 가부장제 사회주의에 환멸을 느낀 그는 탈북 후 ‘주체사상을 벗고 주체성을 되찾는’ 여정을 걷고 있고, 이 길을 다른 북한 여성들과도 함께 가고자 한다.

책을 덮으면서는 북한에서 이미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이 있으며, 이는 “외부의 영향으로 모방된 게 아니”라는 저자의 문장에 여운이 남았다. 이는 체제를 막론하고 가부장제의 영향권에 속한 지구상 대부분 나라들에서 남성 기득권에 저항하는 여성 주체가 등장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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