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5000만원 줄 테니 산재 신청 마라”···쿠팡·김범석의 ‘은폐 시도’ 더 있었다

2025-12-18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 기자회견

‘매뉴얼’ 따라 고액 합의금으로 입막음

“산재 은폐 위해 유족까지 적극 활용”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이 물류센터 산재 사망 사건 은폐를 직접 지시한 정황이 드러난 데 이어, 쿠팡이 ‘산재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 조직적 은폐를 시도한 사례가 더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합의금 액수를 올려 산재 신청을 차단하고 국회·노동부·언론·경찰 등 외부로의 확산을 막는 것이 주요 대응 전략이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18일 서울 서대문구 택배노조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의 산재 은폐 의혹 사례를 공개했다. 2020년 10월 숨진 칠곡물류센터 야간노동자 고 장덕준씨의 어머니 박미숙씨가 참석했다.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장씨는 2020년 10월 12일 새벽 2시 퇴근한 지 한 시간 반 만에 숨졌다. 이듬해 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인정했지만 쿠팡은 계속 책임을 부인했다. 유족은 2023년 3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쿠팡은 국회 청문회를 앞둔 올해 1월에서야 유족과 합의했다. 김범석 당시 쿠팡 한국법인 대표가 메신저로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도록 확실히 하라”고 지시하고, CCTV 관련 장비를 서울 쿠팡 본사로 옮긴 은폐 정황이 전날 알려졌다.

박씨는 “사고 직후 쿠팡은 근로계약서와 퇴직금 정산서, 12주 분의 근무 일수 자료만 제공했고 CCTV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며 “이 세 가지 자료만으로 산재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덕준이와 살던 집과 생업을 비롯한 모든 생활 터전을 잃었고, 남은 가족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며 “김범석 의장은 산재 은폐 지시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사건은 이후 쿠팡이 중대재해 대응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혜경 정의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쿠팡의 ‘중대재해 발생 시 행동 지침’을 보면, 쿠팡은 노동자 사망 등 중대재해 발생 시 대응을 7단계로 세분화해 매뉴얼화했다. 2021년 1월 만들어진 이 매뉴얼은 유족의 산재 신청을 차단하고 언론 접촉을 통제하는 게 핵심이다.

매뉴얼은 사고 직후 유족 중 ‘우호적인 소통 채널’을 확보하고, CCTV·블랙박스 영상 사용과 자료 공유를 금지하도록 했다. 장례식장에 대응팀을 배치해 외부 정보 유입을 관리하도록 명시했다. 또 기자의 취재 의도와 노조 주장을 파악해 즉각 대응하고, 노조·언론·집회 동향을 수시로 파악해 공유하도록 했다. GR(대관)팀을 중심으로 고용노동부의 작업중지 명령을 막고, 국회의원실의 관심도를 파악해 이슈 확산을 조기에 막도록 했다.

이날 대책위가 공개한 사례들은 이 ‘산재 대응 매뉴얼’이 실제로 작동해왔음을 보여준다. 대책위는 지난 5월 심야배송을 하다 숨진 고 정슬기씨 사망 사건에서도 산재 은폐 시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유족이 제공한 녹취록에 따르면 쿠팡 측 대리점 대표는 합의금 1억5000만원을 제시하며 “저 같으면 산재 신청 안 한다. 기간도 오래 걸리고 (인정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회유했다.

지난해 뇌출혈로 사망한 새벽배송 택배노동자 사건에서도 쿠팡 측이 고액 합의금으로 입막음을 한 정황이 있었다. 대책위는 “과로사로 산재 인정을 받을 가능성이 컸고, 유족도 노조 의견에 공감했다”며 “그런데 병원에 상주하던 쿠팡 대리점 대표가 노조 방문 사실을 알고 사전에 제안했던 위로금 액수를 억대로 추가했고, 결국 유족과 잠정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후 유족은 노조에 사과의 뜻을 전하며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쿠팡이 유족을 앞세워 언론 보도를 차단한 의혹도 제기됐다. 지난해 쿠팡 제주 물류센터 사망 사건과 올해 8월 경기 안성 택배노동자 사망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들은 쿠팡 측에 입장을 요청한 뒤, 연락처조차 알지 못했던 유족으로부터 취재 중단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았다.

강민욱 택배노조 쿠팡본부 준비위원장은 “합의서에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고, 쿠팡이 산재 은폐를 위해 유족까지 적극 활용하는 걸 알 수 있다”고 밝혔다. 김광창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김범석 의장의 행위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재 은폐죄와 원인 조사 방해죄, 형법상 증거인멸교사에 해당한다”며 김 의장 수사와 쿠팡의 산재 은폐 의혹에 대한 국회 청문회 실시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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