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가 우세했던 20만 년의 역사가 정말 끝나가는 것일까.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에게 밀리고, 남성들의 취업률과 소득은 예전에 비해 하락하고 있다.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양성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확대되자 특히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거부감과 반발이 커지고 있다. 소위 ‘이대남’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 유럽 극우 정당의 약진에도 ‘앵그리 영맨’이 큰 동력이 되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운동장이 이제 겨우 조금 바로 잡히기 시작했을 뿐인데 기득권인 남자들의 불만이 과도하다는 것이다. 남녀 평등의 현주소에 대한 인식은 정치적 진영, 성별, 개인적 경험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
‘소년과 남자들에 대하여’의 저자 리처드 리브스는 수많은 ‘팩트’를 통해 현재 남자들의 위기가 과장된 주장도, 이념적 공세도 아니라는 점부터 증명한다. 그는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세 아들의 아버지다. 현대 사회의 계급 역학을 날카롭게 파헤친 전작 ‘20 vs 80의 사회’로 명성을 얻은 그는 이번 책에서 남성 불평등의 실태를 데이터로 추적한다.
우선 교육에서 위기의 징후가 뚜렷하다. 미국을 기준으로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성의 학사 학위 취득률이 여성보다 13%포인트 높았지만 지금은 여성이 15%포인트 앞선다. 이제 미국의 명문대 입학사정관들은 남녀 성비를 맞추기 위해 여성에게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등학교 상위 10% 학생 중 여학생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하위 10%에서는 남학생이 3분의 2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부분 국가에서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보다 높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일자리 시장에서도 남자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2019년 미국 20~50대 남성의 취업자 비율은 1979년과 비교해 약 25%포인트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여성은 5%포인트 늘었다. 1979년 미국 고졸 남성의 주간 수입은 현재 가치로 1017달러였지만 지금은 881달러에 그친다.
남성 위기의 징후는 자살률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다. 인구 10만 명당 연령 표준화 자살률은 26.2명으로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특히 남성 자살률은 41.8명으로 여성(16.6명)의 두 배 이상이다. 이 현상은 미국, 영국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물론 여전히 평균적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낮고 정부나 기업의 고위직에서 여성 비중은 턱없이 적다. 그러나 경제적·사회적으로 열세에 있는 남성들의 처지는 과거보다 훨씬 열악해졌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직위와 소득에서) 최상위 계층을 남자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 밑바닥의 남자들에게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리브스는 “남자들의 위기는 게임 중독이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산업 구조와 제도의 경직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자기 절제와 성실함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학교 제도가 여학생에 비해 발달이 느린 남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는 아동 중 4분의 3이 남학생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터 역시 자동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육체적 강인함을 요구하는 제조업은 축소되고 돌봄·교육·의료 등 감정 노동 중심의 산업이 커지면서 남성의 자리가 줄었다.
저자는 남성의 위기를 여성의 성장이나 권리 신장 탓으로 돌리는 시각을 경계한다. 시대와 기술은 빠르게 변했지만 관습과 제도의 경직성 탓에 학교 교육, 직업 훈련, 가정 내 역할 분담에서 남성의 재적응이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구체적인 정책 해법도 제시한다. 첫째, 교육 제도의 시간표를 남학생의 발달 속도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늦추는 ‘레드셔팅(redshirting)’을 권하며 학습 방식의 성별 편향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남성의 돌봄 참여를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남성 전용 육아휴직 제도, 남성 교사 확대 등을 통해 ‘돌봄을 배우는 남성’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직업 훈련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제조업 중심의 구시대적 남성 모델 대신 교육·서비스·돌봄 등 ‘핑크 칼라’ 영역에서도 남성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 개입이 필요하다. 저자는 “정부와 민간이 여성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진출을 도왔듯이, 이제는 남성의 HEAL(건강·교육·행정·문해력) 진출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기의 남자들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란을 낳는다. 오랜 시간 확 벌어져 있던 성별 격차가 이제 겨우 좁혀지고 있는데 남성의 위기를 말하기엔 이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단순한 ‘남자 편들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 평등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키기 위한 논의다. 젠더 갈등이 깊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현실을 성찰하고 양성 평등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이다. 2만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