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한반도, 다시 기회다

2025-02-27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 너무 괴롭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과 탄핵안 가결 후, 지난 1월 어느 저녁 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한국 사회를 이끈다고 하는 이른바 ‘엘리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말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이 ‘위기’라고 생각하는 건 그만이 아닐 테다. 기자라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모든 이가 ‘이러다 정말 나라가 망하는 거 아닐까’ 하는 위기감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광장’에서 주장하는 이들도 방향만 다를 뿐 한결같이 이 나라가 위기라고 소리높여 외친다.

정치는 기능을 상실했다. 관료는 눈치만 본다. 기업은 안주한 지 오래다. 사회는 늙어가고 있다. 이 현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낡고, 늙고, 병들어가는 동안 서로에게 탓을 돌릴 뿐이다. ‘내부’ 모순이 극대화되는 동안 ‘외부’ 공세는 서슬 퍼렇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자국 우선주의’는 수출주도형인 한국 경제에 치명타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대국이 우크라이나라는 약소국을 상대로 한 행동을 들여다보면 섬뜩하다. 강대국은 도덕이라는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위기’라고 생각하는 건,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작금의 상태를 감지해서다.

나는 그래서 역사적 순간을 다시 되짚는다. 한반도의 역사는 이럴 때 크게 변화해와서다. 한반도에선 상대적으로 지배층의 변화가 잘 없다. 그러다 보니 지배층이 ‘위기’에 둔감하다. ‘천년왕국’ 신라와 500년 전후로 기능한 고려, 조선이 ‘둔감한 위정자’들을 상징한다.

그런 한반도는 언제 변혁을 맞이하는가. 내부 모순이 극대화되고, 외부 압박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금이 위기’라고 공감하는 순간 변화가 시작된다. 7세기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융성을 누린 것도 잠시, 백제 공세에 전략요충지 대야성이 함락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내부로도 ‘비담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신라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와 몰락한 가야의 왕손 김유신을 주역으로 ‘변화’를 일으켰고 당나라와 연합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달성한다. 신라의 핵심 귀족들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고 두 사람을 시대의 주역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신라뿐일까? 10세기 고려의 성립은 신라 귀족제의 붕괴와 당나라 멸망이 맞부딪친 끝에 가능했다. 14세기 말의 여말선초(麗末鮮初)는 내부로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간 대결, 외부로는 중국의 원·명(元·明) 교체기가 맞물리며 벌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전쟁 후 냉전과 군사정권의 종말은 1987년 6월 항쟁과 국제적인 데탕트가 합쳐지면서 가능했다.

모든 낡음은 새로움이 나타나지 않을 때 더 도드라진다. 그 도드라짐이 위기다. 지금 우리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건 아직 ‘변화’가 다가오지 않아서다. 하지만 지금 역사는 ‘정치’의 무능과 ‘트럼프’의 등장을 통해 우리에게 ‘변화’를 명령하고 있다. 새로움을 만들라 하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였던 김춘추, 김유신, 왕건, 정도전, 이성계처럼 되느냐.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의 길을 가느냐. 우리에게 달렸다.

이도형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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