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만난 스키·사랑·요리…체육회도 차근차근 바꿔 볼게요”

2025-04-01

한국 첫 스키장 세운 아버지 영향

걸음마 떼자마자 스틱 잡아

초등 2년 때 오스트리아로 유학

‘차붐’ 나라서 왔다니 다들 반겨줘

오빠와 함께 전국대회 휩쓸었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숱한 차별받아

중학교 때 첫 태극마크 달고

88관왕 빛나는 여자 스키 전설로

열정 쏟았던 체육인재육성재단

외압으로 해체되자 한국 떠나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비법으로

독일인 남편과 함께 한식당 운영

유승민 회장의 도와달라는 전화

사무총장 맡길 줄은 상상도 못해

책임감 무거워도 작은 변화부터

여성 리더들의 길 넓히고 싶어

지난달 27일 대한체육회 105년 역사에서 첫 여성 사무총장이 탄생했다. 김나미 사무총장(54)이다. 그는 알파인 스키 국가대표(1986~1995년) 출신으로, 1978년 첫 동계체전부터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까지 40년간 선수, 지도자, 행정가, 국제 스포츠 전문가로 활약했다. 그러다 2018년 돌연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했다. 옛 동독 지역인 에르푸르트에서 독일인 남편과 한식당 ‘볼킴(Woll Kim)’을 운영하며 한국 체육계와 거리를 뒀다. 그런 그에게 지난 2월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의 부름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한국행을 택한 그는 지난달 27일 사무총장으로 공식 임명되는 자리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대한체육회도, IOC(3월20일 IOC 위원장에 여성 최초로 커스티 코번트리 당선)도 유리천장을 깼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 대한체육회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깔끔한 투피스 정장에 스카프를 목에 두른 차림으로 남편 요른 볼슐레거(47)와 함께 나타난 그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는 “대한체육회의 오랜 역사만큼 쌓여온 과제도 많고 변화에 시간도 필요하지만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체육계 다양성·포용성 확대 신호

- 대한체육회 첫 여성 사무총장으로서 소회가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영광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요. 105년 역사에서 첫 여성 사무총장이 됐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체육계에서도 다양성과 포용성이 확대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여성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 많은 여성 리더들이 체육행정과 정책결정 과정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 사무총장 선임, 예상했나요.

“전혀요. 2월 어느 날 유승민 회장이 전화해 도와달라면서 당장 짐 싸서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평소 누나, 동생 하며 친하게 지냈던 터라 농담인 줄 알았죠. 그런데 다음날 또 전화해 재촉했어요. 독일에서 운영 중인 한식당이 잘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포기하고 가냐고 했더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때는 사무총장직을 맡기려는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며칠 후 유 회장이 다시 전화해 사무총장 자리고, 문화체육관광부와도 협의 중이니, 누나만 결정을 내리면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 사무총장은 조직 운영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인데, 임기 동안 특히 역점을 두고자 하는 점이 있나요.

“크게 세 가지 목표를 갖고 있어요. 우선, 선수와 지도자들이 최상의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기존의 지원 제도를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선수 복지 및 커리어 전환 지원을 강화할 계획이에요. 둘째, 체육의 공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추진할 거예요. 아울러, 대한체육회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김 사무총장은 1986년 중학생 때 첫 태극마크를 단 후 전국체전, 용평배 등 전국대회에서 88관왕에 빛나는 ‘한국 여자 스키의 전설’이다. 스키는 그에게 ‘운명’이었다. 1972년 강원 진부령에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인 알프스스키장을 건립한 고 김성균씨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화가이자 베스트셀러 에세이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의 저자인 이정순씨다.

- 스키는 언제부터 탔습니까.

“부모님 말씀으로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탔다고 해요(웃음). 당시 진부령에는 눈이 워낙 많이 내려서 오빠(김명종 전 스키 국가대표)와 저는 스키 타는 게 일상이었어요. 아버지가 스키장을 건립하신 것도 1964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 한국일보 기자 자격으로 참가했다가 처음으로 스키장을 보신 게 계기가 됐어요. 아버지는 그곳에서 스키 강사 자격증까지 따셨죠.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키를 탔고 제 어릴 적 꿈도 월드컵 스키선수가 되는 거였어요.”

- 아버지가 기자였군요.

“아니에요. 평소 스포츠에 관심이 컸던 아버지는 올림픽 현장을 직접 보고 싶으셨대요. 하지만 당시는 일반인이 여권을 만드는 게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방법을 찾던 중 신문기자였던 친구분의 도움으로 기자 자격을 얻어 나가셨다고 해요. 아버지가 사진작가로도 활동한 데다 영어도 잘하셨거든요. 아버지는 당시 집 한 채 값인 하셀블라드 망원렌즈를 사서 올림픽 현장을 촬영하셨어요.”

- 초등학교 2학년 때 오빠와 오스트리아 국립 스키학교로 유학을 떠났더군요.

“부모님께서는 원래 오빠만 스키 유학을 보내 가업을 물려주려 했고, 저는 엄마가 화가인 영향으로 프랑스로 미술 유학을 보내려고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전국체전에 출전해 4관왕을 차지하자 부모님 생각이 바뀌셨어요. 오빠와 저는 인스브루크의 부모님 지인 댁에 머물며 학교에 다녔어요.”

-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외국생활을 한 건데, 할 만했습니까.

“그때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아직 전쟁 중인 나라 아니냐’라고 하거나 ‘입양돼 왔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런데 ‘분데스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는 차범근 선수를 아냐’라고 하면, 다들 ‘아, 차붐!’ 하면서 반가워했어요. 저는 그때마다 자랑스럽게 ‘저는 차붐 선수와 같은 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죠. 지금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체육인은 차범근 선수예요(웃음).”

한국에도 국립 체육 전문 초등학교 세워야

-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제가 다닌 오스트리아 국립 스키학교는 공부와 운동을 체계적으로 병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졸업 후에도 의대나 법대 등으로 진학할 수 있어 선수들이 은퇴 후에도 다양한 진로를 선택할 수 있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어요. 물론 그리움이 커서 어쩌다 국제전화로 부모님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터져 한마디도 못하고 전화를 끊기도 했지만, 좋은 친구들도 많았어요. 덕분에 행복한 유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어요.”(김 사무총장은 한국에도 이제 오스트리아 국립 스키학교와 같은 국립 체육 전문 초등학교가 설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국대회가 열릴 때마다 오빠와 함께 출전했고, 금메달을 싹쓸이했다. 하지만 ‘해외파 선수’ ‘재외동포 선수’라는 말은 상처가 됐다. 그는 국적을 바꾼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도 많이 당했다. 그는 “남녀 선수 통틀어 허승욱 선수와 오빠 김명종 선수만 못 이겼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냈음에도, 올림픽에 여자 선수 출전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자비로 출전하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회상했다.

- 1990년 특기생으로 이화여대 체육대학 사회체육과에 입학했고, 1995년 동 대학 체육대학 사회복지대학원에 들어가 1998년 석사학위를 취득했더군요. 사회복지를 전공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사촌언니가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데다, 저도 선수 시절 부상을 많이 당하면서 9번이나 큰 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마취에서 깨어날 때마다 ‘다시는 스키를 타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컸죠. 우리나라 장애인 비율이 5.2%인데, 그중 후천적 장애인이 91%라고 해요. 저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은퇴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장애인 스키 선수들을 위한 재능 기부였어요.”

- 그래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1997년부터 2년간 대한장애인체육회 스키 국가대표팀 코치도 맡은 거군요.

“맞아요. 그런데 막상 장애인 선수들과 함께한 시간은 제가 오히려 많은 걸 배우고, 제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 어째서요.

“장애인 선수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스키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그들을 통해 저도 현실을 다시 보게 됐으니까요. 1998년 일본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 때 저는 시각장애인 김미정 선수의 코치 겸 가이드였어요. 김 선수는 제가 앞에서 내는 소리를 좇아 스키를 타고 저를 따라오며 경기를 했죠. 그만큼 두 사람 간 호흡이 중요해 우리는 올림픽을 준비하며 24시간 내내 붙어 지냈어요. 그런데 하루는 김 선수가 ‘선생님, 눈빛이 뭐예요?’라고 묻는 거예요. 순간 왈칵 눈물이 났어요.”

- 안타까운 감정이 솟았나보군요.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어요. 비장애인인 저는 묻지 않아도 눈빛이 뭔지 알잖아요. 그런데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아왔어요. 부유한 부모님 덕에 어려움 없이 컸고 한 분야에서 최고이다 보니 늘 저밖에 모르고 거만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했어요. 그런 내가 처음으로 창피했어요.”(김미정 선수는 1998년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에서 알파인스키 여자 회전(시각장애) 4위를 차지한 데 이어 패럴림픽의 최우수선수상 성격을 지닌 ‘황연대 성취상’을 수상했다.)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 3연임 위업

- 2006년 국제바이애슬론연맹(IBU) 총회에서 최연소(35세), 여성, 아시아인 최초로 부회장에 선출됐어요. 2010년, 2014년에도 내리 당선돼 3선의 위업을 이뤘고요. 왜 스키 국가대표 출신이 종목이 다른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직에 도전했습니까.

“2005년 대한바이애슬론연맹에서 이사 제안을 받았고, 이듬해 배창환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님이 저를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으로 추천하셨어요.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해요. 선거를 앞두고 회장님은 제게 ‘혹시 낙선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운명처럼 러시아 한티만시스크에서 열린 총회에서 IBU 부회장으로 선출됐죠. 이후 두 차례 총회에선 만장일치로 선출돼 12년간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무총장(2012~2015년)으로서 남다른 열정을 쏟아부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체육인재육성재단이 2015년 외압으로 하루아침에 해체되는 과정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2016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 당시 최순실씨(개명 후 최서원)가 기업 모금을 강제해 만든 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김종 문체부 차관을 통해 기관 해산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체육 관련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2년 연속 최고 등급을 받은 기관이었어요. 체육영재 발굴, 은퇴 선수 영어교육과 매너교육, 심판·지도자 전문역량 교육, 경력 단절 여성 체육인들을 위한 여성 리더과정 등을 통해 누적인원 1만명 이상의 체육인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죠. 진종오, 장미란, 임오경, 홍정호, 유승민 선수도 이곳을 거쳤고요. 그런데 해산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막아보려 수개월간 백방으로 뛰었지만 소용없었어요. 당시 몇몇 국회의원이 말했어요. 여기까지만 하라고, 안 그러면 네가 다친다고.”

- 좌절감이 컸겠어요.

“큰 상처를 입었죠. 체육계도, 한국도 싫어졌어요. 그래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한 거예요. 남편과 함께 옛 동독 지역인 에르푸르트에 한식당을 열었어요. 남편은 독일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이에요. 2011년부터 2020년까지는 스위스 바이애슬론 국가대표팀 코치와 감독을 했고요.”

잘되는 식당 두고 귀국, 남편 응원 큰 힘

-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2011년 남편이 한국 바이애슬론 국가대표 감독이 되고 싶다며 러시아에서 저와 면접을 본 게 첫 만남이었어요. 그때는 마음에 안 차 불합격시켰어요(웃음). 이후 남편은 스위스 국가대표 감독이 됐고 저는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이다 보니 국제대회마다 마주쳤어요. 그러다 친구가 됐는데, 비슷한 시기에 저는 이혼, 남편은 여자친구와 결별의 아픔을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졌어요. 2014년에 연인으로 발전했죠. 혼인신고는 2016년에 했지만, 한집살이는 우리 둘 다 독일에 정착하고부터예요.”

- 체육인끼리의 결합인데, 남편이 언제 가장 큰 힘이 되던가요.

“이번에요. 빨리 귀국하라는 유승민 회장의 전화를 세 번째 받은 후에야 남편에게 이야기했는데, 남편의 첫 마디가 ‘빨리 짐 싸서 가!’였어요. 영광스러운 일이고 인생 최고의 기회라며 여기 일은 걱정말고 어서 가라고 했어요. 같은 체육인으로서 남편은 저를 자랑스러워했고, 남편의 응원이 제게 큰 힘이 됐어요.”

- 그러면 2년간 혼자 한국살이를 하게 되는 건가요.

“일단은요. 두 아들은 현재 독일에서 학업 중이고, 친정어머니도 가족과 함께 독일에 남기를 원하시거든요.”

- 한식당 ‘볼킴’은 어떻게 차리게 된 건가요.

“2018년 한국을 떠나기 전 제가 가진 직책이 22개나 되더라고요. 그것을 하루아침에 마무리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남편 친구들을 초대해 전골과 갈비 등 각종 한국음식을 차려냈더니 식당을 차리라고 난리였어요. 그래서 우리 부부는 작은 식당을 차리기로 했는데, 규모가 커졌어요. 관광명소인 에르푸르트 대성당이 세워진 언덕 밑 광장 앞에 자리가 나면서 실내 1·2층에 180석, 야외에 80석을 구비한 한식당을 열게 됐어요.”

- 평생 운동과 체육 지도자·행정가로 동분서주했는데, 언제 요리 실력을 키웠습니까.

“저의 할머니가 개성음식 연구가셨거든요. 제가 어릴 때부터 개성식 보쌈김치 담그기 등 요리비법을 가르쳐주셨어요.”

- 식당이 아주 잘된다고요.

“저녁에는 예약 없인 식사할 수 없을 만큼 붐벼요. 소불고기, 오리불고기, 닭볶음,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을 파는데 특히 오리불고기 인기가 많아요. 일하는 사람은 저와 남편까지 합해 주방 8명을 포함해 30명이에요. 우리 부부는 오전 8시에 문을 열고 자정까지 일했어요.”

- 그러면 이제 음식맛은 누가 내나요.

“귀국하기 전 저만의 비법을 셰프들에게 다 전수해주고 왔답니다(웃음).”

인터뷰가 끝난 후 김 사무총장은 생선회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주변의 일식당을 수소문했다. 여성 체육인으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과 강단을 지닌 그이지만, 뒤늦게 만난 사랑이어서일까. 남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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