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추상회화가 유행한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로 속에서 모든 이념과 논쟁을 벗어난 채 아름다움만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이를 위해 어떤 상황 묘사나 형체도 제거한 채 오로지 점, 선, 면만으로 캔버스를 구성한다. 이렇게 평면성을 강조함으로써 문학보다는 서사성이 약하고 조각보다는 입체성이 약한 회화만의 차별화를 꾀했다. 여기 조경재의 작품이 있다. 얼핏 보면 추상회화다. 한편으로는 기하학적 형태와 구조를 중시한 20세기 초 러시아 구축주의의 분위기도 풍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이다. 그렇다고 추상적으로 보이는 사물의 표면을 촬영한다거나, 이미지를 조작하고 합성하는 디지털 과정 또한 거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직접 물리적 세계를 구축한 뒤 촬영한다.
조경재는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사물이나 재료를 쌓거나 구부리고 조합해 추상적 공간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물의 본래 의미는 사라진다. 대신 형태와 구조, 사물 표면의 색만 남는다. 일반적으로 회화의 평면성이 물감으로 캔버스를 채우는 과정이라면 사진의 평면성은 시각 세계를 프레임에 맞춰 생략하고 오려내는 과정에 가깝다. 입체적 대상을 촬영하는 한, 추상회화가 부정하려던 재현의 속성을 사진은 버리기가 어렵다. 조경재는 입체적 대상의 일부를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공간 자체를 추상적으로 구축해 버림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의 구축물은 실재하지만, 촬영 후에는 사라지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때로 촬영 후 사라질 입체물을 구축하는 이 과정 자체가 작가의 즉흥적인 퍼포먼스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곧, 입체를 기록한 사진적 평면이 아니라 평면을 위한 입체의 탄생 과정이다.
송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