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장애인 오케스트라 ‘리베라’ 출범
음악 전공 시각·청각·지적 장애인 구성
1년 준비 끝 40명 단원 지난달 첫 무대
道, 2년간 수당·연주회·강사 등 지원
‘1호 기부’ 김동연 지사 이어 후원 행렬
#1. 지난달 20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 효원로의 경기아트센터 지하 연습장. 창밖을 맴도는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실내에선 굵은 땀방울이 연신 쏟아졌다. ‘경기 리베라(Libera) 오케스트라’라는 이름표가 붙은 연습실에선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단원들의 매서운 눈길은 쉼 없이 악보를 따라가며 손끝 감각과 호흡을 맞췄다. 지난해 10월 40명의 1기 단원을 모집하고 ‘세계 장애인의 날’인 지난달 3일 창단공연을 치른 ‘경기도 장애인 오케스트라’의 연습실 풍경이다.
국내 최초의 인재 양성형 장애인 오케스트라를 표방한 이 관현악단은 열정만큼은 여느 오케스트라에 뒤지지 않는 듯 보였다. 초대 지휘자인 박성호(사진) 성신여대 겸임교수는 “장애인 단원은 남들보다 1000배 이상 노력한다는데, 한 곡을 1000번 이상 했다가 아니라 비장애인보다 1000배 이상 연습하는 것”이라며 “활 긋는 것부터 손가락 번호를 누르는 것까지 반복해 여기까지 온 친구들이 얼마나 대단합니까”라고 되물었다.
#2. 관악기 오보에 연주자인 심하연(20)씨는 하루 10시간 넘는 고된 연습을 소화하고 있다. 대형 제약회사가 후원하는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해온 심씨는 최근 경기 장애인 오케스트라 창단 소식을 접하고 지원했다. 발달장애인인 그는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지난해 9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까지 도전했다. 어머니 권유로 7세 때 처음 피아노를 접했고 다시 3년 만에 오보에를 배웠다.
심씨는 “빌린 악기라서 그런지 처음에는 소리가 이상했다”며 “소리를 내는 데에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럿이 합주할 때가 가장 좋다. 노래 부르듯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다”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경기 과천에 딸을 태우고 온 아버지 심재열(53)씨는 “딸 아이가 음악을 시작할 때 이렇게까지 (오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며 “오케스트라 참여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업하고 경제적 보상까지 받는 일인데 이런 기회가 늘어 반갑다”고 말했다.
◆1년 만에 창단 성과… “기적 같은 일”
경기도 장애인 오케스트라가 1년여의 준비 끝에 경기 리베라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공식 창단해 활동에 들어갔다. 리베라는 라틴어로 ‘자유, 자유롭게 하다’는 뜻을 지녔다.
1일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달 3일 경기아트센터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창단식은 감동의 물결을 이뤘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무대에 올라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며 여정을 되돌아봤다. 2023년 11월 도의회에서 제안한 창단은 흐름을 타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김 지사는 그 자리에서 수락했고 도 집행부와 도의회, 도민 모두 이견이 없었다. 김 지사는 “다 같이 한마음으로 해주셨다”며 “문화가 꽃피는 경기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의 진행자이자 홍보대사인 김경란 아나운서는 끝내 눈물을 떨궜다. 후원자인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는 협연으로 화답했다. 시각장애 피아노 연주자인 김예지 국회의원(국민의힘)은 “이 기적이 전국에 퍼져 나가기를 응원한다”며 격려했다. 무대에선 ‘파랑돌’(조르주 비제), ‘차르다시’(비토리오 몬티), ‘가브리엘 오보에’(엔리오 모리코네) 등의 곡이 연주됐다.
리베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2년간 활동하며 매월 연습비, 교통비 등 연습수당과 별도의 공연수당을 받는다. 음악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전문 강사로부터 주 2회 집중 지도를 받고 정기 연주회 무대에 오르는 기회도 얻는다. 도 관계자는 “다른 장애인 오케스트라와 다른 점은 발달장애 외에 모든 장애를 아우른다는 것과 전문 강사의 지도 등 인재양성형으로 운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해 단원 공개 모집에선 총 83명이 지원해 악기별 실기 및 면접심사를 거쳐 40명이 선발됐다. 바이올린 18명, 비올라 4명, 첼로 5명, 콘트라베이스 1명, 플루트 2명, 오보에 2명, 클라리넷 2명, 호른 2명, 트럼펫 1명, 튜바 1명, 타악기 2명이다.
18∼43세 단원 대다수는 지적·자폐성 발달장애인이며 시각장애인 2명, 청각장애인 1명이 포함됐다. 예술학교·음대 출신으로 바이올린 등에서 음악성을 인정받은 단원들과 청각장애인이지만 팀파니, 마림바, 스네어드럼 등 타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20대 음악인 등이 동참했다.
지휘자인 박 교수는 “과거 장애인 오케스트라 지휘가 너무 힘들었지만 여전히 나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고백했다. 국립 쇼팽음대에서 공부한 그는 2006년부터 2013년까지 7년간 국내 최초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하트 오케스트라’의 초대 지휘자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과거 사회복지사나 전문의들이 장애인의 합주는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을 때 무턱대고 ‘할 수 있다’고 답해 지휘를 맡았다”며 “장애를 지닌 친구들에게는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물어보고 기다리면 조금씩 양보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동연 지사, 1호 기부금… 후원 봇물
연습실에서 만난 단원 부모들은 “음악을 할 때 행복한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감사하다”고 입을 모았다. 더블베이스·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이준영(26)씨 어머니 김형숙(54)씨는 “자폐 성향이 짙은 아이여서 도무지 세상에 관심이 없었는데 TV에서 음악을 들으면 기억하고 따라부르는 모습을 보며 피아노부터 가르친 게 인연이 됐다”고 전했다. 음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이 후원하는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하던 준영씨는 이곳 창단 소식을 접하고 합류했다.
비올라 연주자 진승연(23)씨 어머니 최상예(51)씨도 “피아노를 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아이 친구의 얘기를 듣고, 열 살 때 승연이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에 갔는데 자폐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며 “동네에서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 분한테 부탁드렸고 이후 악기를 저렴하게 가르쳐주는 교회에서 비올라를 배웠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음악으로 대학을 가고 취업도 하는 비장애인과 달리 심리 치료 차원에서 시작하는 장애인들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면 주저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리베라 오케스트라 창단과 함께 재능기부와 후원금 나눔 등의 활동도 봇물이 터지듯 하고 있다. 두 달 만에 5300여명의 서포터스가 모였고 지난달 중순 기준 8000만원의 후원금을 넘겼다. 1호 기부금 약정자는 김 지사였다.
이상현 경기필하모닉 기획실장은 “수십년간 오케스트라를 운영해온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며 “운영팀의 전문성을 살려 악기 편성과 곡 선택, 오디션 방식은 물론 보호자와의 관계 설정까지 실무적 부분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최봉선 경기도 장애인복지회장도 “십시일반 후원하자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면서 “문화예술 활동은 장애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김상수 경기도 문화체육관광국장 “다른 장애인 악단과 협업 고르게 기회 닿도록 운영”
“소수가 누리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보다 많은 장애인에게 고르게 기회가 돌아가는 오케스트라 운영을 두고 고민해왔습니다.”
지난달 3일 공식 출범한 경기 리베라 오케스트라는 고뇌의 산물이다. 1년 전 경기도의회의 제안이 결실을 보기까지 다양한 논의와 물밑 준비가 이어졌다. 김상수(사진) 경기도 문화체육관광국장은 도내 기존 장애인 오케스트라와의 조율이 가장 어려웠던 점이라고 꼽았다.
김 국장은 “도내에는 이미 활동 중인 27개의 공립·민간 장애인 오케스트라가 있다”며 “이 단체들과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하고 협력을 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고 전했다. 도가 장애인 오케스트라를 꾸리면 자칫 소외되거나 지원이 줄어들까 우려하던 곳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는 “지난해 12월 경기아트센터와 12개 공립·민간 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체 간 업무협약이 맺어졌다”며 “경기아트센터는 민간 장애인 오케스트라가 참여하는 연주기회 제공에 협조하고, 민간 장애인 오케스트라는 소속 단원들이 경기 리베라 오케스트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상호 협조한다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리베라 오케스트라는 계약 기간 2년간 단원들을 숙련된 연주자로 키워내고 이후 새 기수를 선발해 꿈을 이어가도록 돕는 ‘인재양성형’ 오케스트라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도민들이 기부금 후원, 재능 기부, 장소 제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해 장애인 예술을 응원하고, 공연을 즐기는 ‘도민참여형’ 오케스트라인 것도 차별화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기회’라는 도정 철학과 장애인 오케스트라를 짝지어 △교육받고 연주할 기회가 생기는 것 △교육과 연주경험이 더 나은 기회와 연결되는 것 △소수 장애인이 아닌 더 많은 장애인 연주자에게 고른 기회가 부여되는 것 △사회적 차별 없이 동등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 등이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국장은 다양한 도민 후원 방식도 강조했다. “참여 방식은 다양합니다. 기부금을 내도 되고, 재능 기부도 환영합니다. 장소를 제공해도 되고 무대를 함께 꾸리는 것도 가능하며 팬카페에 가입하면 단원들의 연습과정 등 활동 모습을 보며 성장 과정을 응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장애인 연주자는 도민 성원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며 “후원자들을 내년 상반기에 개최하는 첫 정기연주회에 초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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