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전쟁 영웅 무어 장군의 ‘굴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3-16

2002년 개봉한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벌어진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불리한 지형의 계곡에 고립된 미군 1개 대대 병력을 지휘해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월맹군의 포위망을 뚫은 할 무어(1922∼2017) 중령이 영화 주인공의 실존 인물이다. 할리우드 스타 멜 깁슨이 무어 중령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대대장으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대대원 다수를 구한 무어는 이 같은 공로로 미군에서 명예훈장(Medal of Honor)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았다. 베트남전 종전 후에도 육군에 남은 무어는 장군으로 진급했고 1977년 중장을 끝으로 전역했다.

미국 조지아주(州)에는 ‘포트 베닝(Benning)’이란 이름의 육군 기지가 있다. 보병학교, 기갑학교 등 미 육군의 교육·훈련 시설이 밀집한 곳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3년 5월 미 국방부는 포트 베닝이란 간판을 내리고 무어 장군 이름을 따 ‘포트 무어(Moore)’로 바꿨다. 원래의 기지명이 남북전쟁 당시 남군 지휘관이던 헨리 베닝 장군에서 비롯한 점을 바이든이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남군은 흑인 노예제 수호를 위해 북군과 싸웠으며, 베닝 장군 본인 역시 완고한 노예제 찬성론자였다. 바이든은 2021년 1월 취임 후 국방부에 인종 차별의 잔재 청산을 명령한 바 있다.

사실 포트 무어는 한국으로서도 크게 반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1945년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무어는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한국에 파병됐다. 중공군 및 북한군과 싸우며 세운 뛰어난 전공으로 참전 기간 동성훈장(Bronze Star)을 세 차례나 받았다. 무어와 한국의 인연은 그가 장성이 된 뒤에도 계속됐다. 소장 시절 주한미군에 부임한 무어는 8군 부사령관, 7사단장 등을 지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 육군 7사단은 1971년 닉슨 독트린의 여파로 철수하기까지 한국에 주둔했다. 무어는 한국인들이 기억할 만한 ‘전쟁 영웅’이라고 하겠다.

최근 미 국방부는 포트 무어 명칭을 포트 베닝으로 원상 복구했다. 다만 옛 남군 지휘관 베닝 장군 대신 성(姓)이 같은 프레드 베닝(1974년 별세) 육군 상병을 기리는 것으로 의미가 변경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수훈십자훈장을 받은 프레드 베닝은 순전히 포트 베닝 이름의 부활을 위해 미 국방부가 새롭게 발굴해낸 전쟁 영웅이라고 하겠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국방부가 트럼프와 ‘코드’를 맞추며 군에 남은 바이든의 흔적을 지워 없애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포트 무어가 생긴 지 2년도 채 안 돼 사라진 현실에 무어 본인은 물론 그 후손으로선 굴욕감을 느낄 법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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