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
히가 스스무 지음 | 김웅기 옮김
서해문집 | 552쪽 | 3만3000원
겨울철에도 온난한 기후와 푸른 해변을 갖춘 오키나와 본섬과 그 일대 섬들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모두 선호하는 휴양지다. 평온한 풍광과 달리 오키나와의 역사에는 일본과 미국에 의한 점령과 전쟁이 남긴 상처가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출신 만화가 히가 스스무가 1995년과 2010년 각기 발표한 <모래의 검>과 <마부이>를 합쳐 2023년 출간한 그래픽노블이다. 오키나와인들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담담하면서도 사실적인 그림체로 담아냈다. 만화의 형식을 빌렸을 뿐 주제의 폭과 깊이에서 문학작품에 필적한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아트 슈피겔만의 <쥐>와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의 정치적 혼란을 다룬 마르얀 샤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를 연상케 한다. 중심 인물 한 명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쥐>나 <페르세폴리스>와 달리 매번 등장 인물이 바뀌는 옴니버스 형식이다.

1부에 실린 단편 7편은 태평양전쟁 말기의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다. ‘모래의 석양’과 ‘모래가 부르는 소리’에 드러난 일본군의 모습은 비겁함 그 자체다. 일본군은 미군이 상륙하자 동굴로 피신하는데, 주민들을 바리케이드로 삼는다. 일본의 패전 소식도 모른 채 어느 섬의 동굴에 은거하던 한 일본군 부대는 주민들이 미군과 소통했다는 이유로 심야에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사살하기도 한다. 실제로 1945년 3월26일부터 6월23일까지 약 3개월 동안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중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12만명 정도가 사망했는데, 이 중 다수는 일본군이 ‘집단자살’을 강요하는 바람에 희생됐다.
‘학교’에서는 애초 류큐 왕국이었다가 일본에 합병된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가 소환된다. 미군의 진격을 앞두고 학생들까지 총동원돼 방어 진지 건설에 나서던 시기 오키나와 나하에서 교장과 학생들이 슈리성 지하에 보관된 고문서를 필사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1609년 작성된 류큐 왕국의 문서는 오키나와인들이 “소국이면서도 다른 나라와 싸우지 않고 교역으로 번성한 긴 역사”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이런 류큐 왕국을 1879년 병합했고,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오키나와의 땅과 주민들을 본토인들을 위한 방패막이로 치부했다.
미군은 오히려 포로들에게 인간적인 처우를 해주고 주민들을 도와주는 선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작가는 그러한 ‘인간적’ 모습과 별개로 미국이 전후 오키나와를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병영화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일본군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미군들의 통역을 맡았던 오키나와인은 종전 후 오키나와에 들어선 미군 기지를 보고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해버렸구나…피트나 로저는 좋은 사람인데 어째서…”라고 말한다. 개인으로서의 미군이 군국주의에 세뇌된 일본군보다 나은 점이 있었을지 몰라도, 미국의 제국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1997년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소설가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의 눈물>에서 “전후 일본의 체제는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기지의 75%를 집중 배치하는 것, 즉 미·일 안보체제의 부담과 모순을 오키나와에 떠넘김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20년 가까이 점령하고 있다가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했지만, 기지는 그대로 남았다. 2부에서는 미군 기지에 의해 황폐화한 오키나와의 실상을 고발하는 단편 7편이 수록됐다. 미군 기지에 땅을 내주고 일본 정부로부터 지대를 받는 땅주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군용지의 주인’은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인들의 심성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다룬다. 일본 방위시설관리청이 땅주인들에게 지급하는 돈은 연간 약 600억엔(약 5699억원)에 이른다. 땅주인들은 불로소득의 달콤함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거나 돈을 빌려달라는 지인들의 강권에 시달린다.
‘귀향’에서는 미군 기지 유치 찬반을 놓고 마을 여론이 둘로 쪼개지는 상황을 다룬다. 노인들은 마을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하지만 청년층은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군 기지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부는 오키나와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 ‘군무원’의 한 등장인물은 미군 기지에 “그야말로 지구 반대편에 가서도 전쟁할 수 있을 만큼”의 물자가 쌓여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병참이 아니라 무역 근거지였다면 오키나와도 윤택해지고 보람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미군은 기지에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아요. 그리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죠. 그저 전쟁에서 소비되기를 기다릴 뿐이에요.”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건 ‘유타’라고 불리는 무녀의 역할이다. 이들은 저승에 간 사람들의 넋과 소통하고, 산 사람들의 고통과 불안을 달래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작품 속에서 유타들은 ‘우간’이라 불리는 기도 행위를 통해 오키나와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오키나와인들이 지켜야 할 공동체적 연대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책 말미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오키나와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을 위한 도구일 뿐이고, 우리는 그 사이를 오가고 있죠. 더 나은 것을 꿈꾸어 봤지만, 식민지화된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어요. (중략)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서로에게서 행복을 찾아야 해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