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다양한 사람들 만나 공감하는 게 가장 좋다, 진보당 동구의원 박문옥

2025-05-10

매체를 통해 보는 진보당 사람들은 냉철하고 과격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석에서 만난 (몇 안 되는) 그들은 모두 여리고 따뜻하며, 착하고 유쾌했다. 그렇겠지. 공감 능력이 뛰어나니 낮고 어두운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방탄조끼를 두르고 입을 스크레이퍼처럼 날카롭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사람들은 아메바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제각기 흩어져 제 할 일을 하다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땐 한 덩어리가 된다. <미키 7>(2022, 애드워드 애슈턴)의 크리퍼 같다. 진보당 인사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누가 나갈지, 나가서 무슨 말을 할지, 한 명이 나갈지 두 명이 나갈지 세 명이 나갈지, 나가면 언제 나갈지, 그 모든 것들을 결정할 때마다 토론했다. 정말이지 과잉합리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그리고 귀엽지 않은가. (진심으로 애정을 담은 표현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지면을 맞추기 위해 제한된 인터뷰 시간이 아쉬웠다. 그동안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 앞으로 이쪽 사람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Q. 소개 부탁한다.

진보당 소속이고, 동구 방어, 화정, 대송동 지역구 구의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문옥 의원이다.

Q. 초선인가, 재선인가?

3선이다.

여성 할당제로 정치에 입문, 두 번의 낙선을 거쳐 아슬아슬하게 3선 동구의원

Q. 정치에 어떻게 입문하게 됐나?

2006년 당시 민주노동당의 여성 할당을 30퍼센트로 도입하고 나서 동네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모였는데, 한 분은 만삭이고 한 분은 애 놓은 지 100일이고. 난 그때 당시에 애가 네 살이었다. (선거에 참여할) 조건이 내가 제일 좋아서 출마하게 됐는데 당선이 됐다. 그렇게 만 30세에 의원 생활을 시작했고, 2010년도에 재선을 한번 했고, 8년을 쉬다가 이번에 다시 세 번째로, 구의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Q. 8년은 왜 쉬었나?

2014년도에는 낙선했고, 2016년도에 우리 동구 국회의원을 했던, 지금 동구청장인 김종훈 국회의원 지역 사무소의 사무국장으로 일을 했고, 2018년도에도 낙선을 했다. 그래서 8년은 낙선으로 구의원 활동을 못 했다.

Q. 울산이 예전에는 진보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고 들었는데 최근에는 보수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떻게 3선을 할 수 있었나?

2018년도 전까지는 울산 동구나 북구는 민주당보다는 진보 정당들에 대해서 주민들의 지지와 응원이 많았고, 2018년부터 민주당이 지방 정치에 많이 진출하게 돼서, 나도 이번에 사실은 쉽게 된 건 아니다. 구의원이 2명인데 민주당이 후보를 2명 출마시켜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살아서 돌아와 있다.

Q. 민주당 의원과 붙었나?

민주당 두 명도 있고 국민의힘도 후보가 한 명이었고, 우리도 한 명이었고, 다른 진보 (성향의) 정당에서도 후보가 있었다.

울산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 없는 토박이

Q. 울산에서 태어났나?

그렇다. 울산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Q. 고향 얘기를 들려 달라.

난 고향이 북구 강동인데, 북구 강동이 원래는 바닷가 마을이다가 지금은 강동 산하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면서 강동이 마치 산하라는 동네로 (대표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인식을 많이 하고 있다. 강동에는 정자, 그다음에 제전, 신명, 이렇게 바닷가 마을들이 주로 있고 달곡, 구남 같은 농촌 마을이 있다.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부모가 어업에 종사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이발(소를 운영)했고 엄마는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해가지고 바닷가 일을 하지 않는, 동네에 몇 안 되는 집에서 나고 자랐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전부 다 울산에서 나왔다.

Q. 진보당 당원 활동은 언제부터 어떻게 하게 됐나?

우리 동네에서 내 또래 친구들 중에 4년제 대학을 간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나는 울산대학교를 가게 됐는데, 내가 가고 싶었던 데는 원래 도서관학과나 문헌정보학과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자여서 자취할 수 있는 학교는 보내줄 수 없다고 해서 선택할 수 있는 대학이 울산대학교랑 울산전문대학교(현 울산과학대학교) 두 곳밖에 없었고, 울산대학교로 갔다. 나름대로 반항이, 부모가 바랐던 영어영문학과 일어일문학과가 아닌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대학교면 냉난방도 되고 시설도 좋은 강의실일 줄 알았는데, 부모가 어렵게, (넉넉하지 않게 살고 있던) 그 동네에서 대학을 보내줬는데 (울산대학교) 시설이 너무 낡은 거였다. 거기다가 공대 건물 공사를 해가지고, 공대생들은 야간 수업만 하는데, 우리 과만 (공사 중인 공대 건물에) 수업 배정을 했었다.

교실을 바꿔 달라고 싸우다가 학생운동을 하게 됐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이 지역에서 계속하다가 지역 활동을 더 전면으로 하자고 해서, 당시에 민주노동당에서 (나를) 동구 지역으로 파견해서 동구로 들어가게 됐다.

Q. 노동운동 하던 이들이 진보당에 많은 걸로 아는데, 박 의원도 노동운동을 했었나?

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남편은 지금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도 대학을 졸업해서 민주노총에 상근하다가 민주노총의 상근자들도 실제로 현장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해서 지금 2교대로 열심히 노동하고 있다.

처음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졌을 때 노동자들이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서 2022년도까지만 하더라도 전부 노동자 출신들의 후보들을 내보내고 실제로 많이 당선도 됐다. (당선된) 뒤의 활동에 대해서는 (노동운동에 대한) 담보나 (노동 관련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를 잘 해주지 못하다 보니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의원들도 있었지만, 사실은 평가가 좋지 않은 노동자 출신 의원들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2006년도부터는 지역에 여성 할당제가 도입되면서 여성 후보들이 많이 진출하게 되고, 또 노동자여야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의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거든. 노동성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우리 진보당에서는 노동자 대표 선수도 있고, (현장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노동자성을 대변할 수 있는 후보들도 후보로 많이 추천하고 있다.

진보당은 노동당과 비교할 때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노동자 외의 계층까지 아우른다

Q. 노동과 관련해 직관적 명칭을 가진 노동당이 있다. 진보당과 노동당은 어떤 차이가 있나?

우리 사회의 모순을 바라보는 문제에 있어서 노동당과 진보당의 차이가 있다. 학생운동에서 어느 파냐 어느 파냐, 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런 문제보다는 노동자 입장을 저희보다는 (노동당이) 더 선명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진보당은 노동자도 대변하지만, 우리는 대중정당을 지향하고 있는 당이라는 점에서도 노동당이랑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남편과는 시민사회 운동을 하면서 만났나?

대학교 때 선후배였는데 (처음엔 서로) 성향이 완전히 달라서 좋아했지만, 결혼하고 살면서 힘들었다. 나는 약속이 있으면, 아까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듯이), 일찍 와야 하는 스타일이고 약속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어기면 안 되는 사람인데, 우리 남편은 약간 뺀질거리는 스타일이다. 물건을 사러 가면 나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나오는데 우리 남편은 이 물건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 얘기를 해주고 나오는 스타일이다.

연애할 때는 (내가) 싫은 얘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니까 (남편의 그런 모습이) 좋았는데, 막상 살면서는 (그런 모습이 불편했다가) 한 15년 살고 나니까 이제 다 귀엽다.

Q. 자녀는?

대학교 4학년인 아들 하나 있다.

남편의 뺀질거림이 좋았고, 부모와 형제들은 언제나 나를 지지한다

Q. 그럼, 처음 남편과 만났던 때는 언제인가?

남편이 72년생, 내가 75년생이다. 내가 졸업할 때쯤이고 남편도 군대 갔다 와서 졸업할 때쯤이었다.

남편의 뺀질거림이 좋아가지고. 나와 너무 서로 다르니까 그게 좋아서 연애를 시작했다. 밖에 나와서도 본인(남편)도 시민단체 활동을 계속했고 나도 그 활동을 계속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왔다.)

Q. 박 의원 가족들은 시민사회 운동에 반대가 없었나?

대학생 때 학생 운동할 때는 (부모가) 그게 학생운동인지는 모르고 그냥 뭐 학생회 부회장을 한다, 비상대책위원장을 한다, 이러면 그냥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1996년, 1997년, 1998년, 학생운동 (과정에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후배 부모들이 (우리 부모에게) 전화해서 다 알게 된 거지. 딸이 데모하고 다닌다는 걸 그때 알게 된 거다.

내 형제가 딸 셋, 아들 하나인데, 내가 첫째거든. 아들이 막내고. 내 부모는 날 단 한 번도 딸로 키운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저 첫째, 맏이(인 자식이었다).

남동생도 본인이 아들이어서 특혜를 받은 건 (없다고 한다.) 셋째 (여동생과) 남동생이 두 살 차이 나는데, 남동생 말에 의하면, 당시 해양소년단을 한 집에 한 명이 해야 하는데 그때 누나 대신 해양소년단 한 게 본인이 아들로서 받은 특혜라고 말할 정도다. 누나로서 안타깝긴 하지.

부모는 내가 뭐 못 하게 말리지 않았고, 동생들도 굳이 언니가, 누나가 이런 길을 가야 되냐고 하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되레 큰일이 있거나 의논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일 든든하게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다.

Q. 노동·시민·사회운동을 하면서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진보당에도 많은 걸로 안다. 박 의원 내외는 어떤가?

나는 안 갔다. (내가 해온 활동에서는) 구속될 상황이 없었다. 1998년도에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싸움할 때 우리가, 지금으로 따지면 불법 선전물을 만들어가지고 그걸 공장에 넣어주는 역할, 이런 걸 했는데 나는 검문을 안 받았다. 학생 운동권처럼 안 생겼는지 검문을 안 받았다. 8.15 통일 행사 한두 번 정도 (조사를 받은 것) 빼고는 없었다. 남편도 구속된 적은 없다. 우리 학번 때는 구속된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여성이었기에 아이들 문제를 더 들여다볼 수 있었다

Q. 진보당 활동을 하면서 여성이어서 좋은 점이 있었을 테고 여성이어서 힘들 때가 있었을 것 같다.

여성이어서 좋았던 건, (태어난) 동네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동네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또 아이와 함께 성장하면서 (이와 관련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기존의 남성 정치인들은 그런 데에 대해서 경험을 안 했던 세대였다. 난 (태어나서 평생 살아왔던 곳에서) 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어린이집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친환경 무상급식도 관심이 있고, 왜 동네에 도서관이 없는지, 아이들이 놀이터를 갔는데 봄가을 빼고는 여름과 겨울에는 못 노는 놀이터를 왜 수십억을 주고 만들어야 할까, 해서 아이들 요구에 맞는 시설들이나 놀이터를 만들거나 정책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게 여성이어서 장점이었다.

반면에 여전히 정치문화는 남성들 (중심이다) 보니까, 어떨 때는 정말 죽도록 술 마시고 다음 날 화장을 곱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회의에 들어가서 앉아 있기도 하고. 또 (공무원) 과장, 계장은, 그때 내가 서른이었으니까, 나이가 많잖아. 50대 초중반 되는 공무원들은 술자리에서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좋겠다, 의원님은. 그 나이에 전부 다 의원님, 의원님 하니까 너무 좋지 않냐.’ 나는 그게 충격이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당원들은 다 문옥아, 문옥 씨, 이렇게 부르지 내가 의원이 됐다고 의원님(이라고 부르며 굽신거리는) 사람들은 없었거든. 그래서 내 주변에 그런 사람 없는데요, 그랬더니 비아냥거리던 공무원들이 놀라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를 (의도하지 않거나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가능하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교되지 않도록 악착같이 했다.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서 출장 갈 일이 있으면 아이를 친정에 데려다 놓고 일이 끝나면 다시 데리고 오고. 친정에서 내 아이의 돌봄 문제를 분담해 줬다.

정치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공감하는 게 가장 좋다

Q. 부모는 박 의원의 정치 활동이나 진보당 활동에 개의치 않았던 거 같은데, 태어나고 자랐던 마을에서 박 의원의 시민사회 운동과 정당 활동에 대해 인식이 어땠었나?

처음에 내가 출마했을 때 구의원 후보만 9명이었다. 3인 선거구였는데 그중에 나만 여성이었고. 젊은 여성이 나와서 되게 사람들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또 선거 운동했던 동지들이 당시에 미포조선에 다니는 우리 노동자 당원들이어서 작업복을 입고 나와서 바위처럼 맞춰 율동하며 선거 운동을 했거든. 자원봉사를 해줬으니까.

주민들이 처음에는 되게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젊은 여자가 왜 이 더러운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 사실 처음에는 대답을 못 했는데 선거 운동을 하다 보니까 내가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면 평생 만나지 못할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더라고. (그게 너무 좋았다.)

새벽 4시 반에 (현대)중공업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는데 마땅한) 주차장이 없으니까 안전한 곳에 주차해 놓고, 히터를 틀어 놓고 몇 시간을 버티다가 출근하는 노동자들도 만나게 되고, 우리 선거구에 바다가 있으니까 여성 어업인인 해녀들도 만나게 되고, 남성 어민들도 만나게 되고. 내 부모도 자영업자인데,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가족끼리 24시간 없이 장사를 하지 않나. 그런 분들도 만나게 되는 거지.

(자영업자 중의) 한 분을 소개하면, 월봉시장에 ‘미화당 참 한우’라고, 식육점을 하는 사장이 있는데, 우리가 그때 선거 공보물에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 이랬더니 자기는 365일 중에 365일 식육점을 여는데 왜 그런지 아냐는 거다. 모른다고 얘기했지. 그래 놓고 무슨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얘기를 하냐고 했다.

그 집에 손님이 많으니까 선거 때마다 그 집에 가서 손님들에게 명함도 뿌리고 커피도 한 잔 얻어먹고, 사장이 여러 가지 물으면 대답도 하곤 했는데, 마지막 날 그동안 선거 운동할 수 있도록 해줘서 감사하다 인사를 했더니 나를 찍겠다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얘기하는 게, 1998년도 IMF 때 (현대)자동차에 본인이 희망퇴직으로 쫓겨났고, 나오자마자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 결심한 게, 자동차 다니던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내가 절대 꿀리지 않도록 살겠다, 해서 정말 악착같이 식육점을 했다 하더라고. 그런 (사람들의 인생) 얘기들을 들으면서 내가 (그렇게 만나는 이들에게)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고, 그때마다 만난 인연들은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누구는 좀 큰 정당에 가서 정치를 하면 훨씬 편할 건데 굳이 뭐 하러 (소수당인) 진보당에 있냐, 라고 얘기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진보당은 작년부터 지방선거를 준비했다

Q. 3선 구의원이다. 내년에 지방선거가 있는데, 유지할 것인가 체급을 키울 것인가?

우리는 후보, 출마, 이런 걸 당원들과 의논하고 있고, 이미 진보당은 작년 7월부터 내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후보자 학교를 시작했다. 후보도 발굴하고, 2주에 한 번씩 모임을 하면서 울산의 다양한 정책에 관해서 공부도 하고, 그다음에 지역 사업을 어떻게 할 건지, 그리고 한 달 동안 진행했던 지역 사업을 보고하(며 공유하)고 있다.

나랑 함께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당원들은 내년에 동구청장 재선이 목표이고, 그런 경우 김종훈 동구청장이랑 구의회에서 호흡을 맞춰야 할 사람이 필요하니 그대로 구의원으로 출마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는 이들도 있고, 반면에 이제 체급을 키워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내는 이도 있다. 나도 결정해야 할 시간이 왔는데 전자 쪽(구의원)으로 당원들의 의견이 많고 나도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 싶어서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 여전히 고민 중인데 확정은 아직 하지 않았다.

Q. 3선 구의원으로서 드러내 보이고 싶은 실적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달라.

나한테 맨날 붙는 타이틀 중의 하나가, 울산에서 최초로 어린이 놀이터 물놀이장을 제안해서 만든 것이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아이들 놀이터 하나 만드는 데 보통 한 20~30억 원이 들거든. 근데 아이들이 (그렇게 만든 놀이터에서 주로) 봄, 가을밖에 안 놀다 보니 (경기도) 성남시에서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했던 공무원이 있었나 보더라.

(그 공무원이) 아이들은 바닥 분수만 있어도 너무 재미있게 노니까 어린이 놀이터에다가 바닥 분수를 심고, 미끄럼틀 내려오는 것을 조금 움푹 파이게 해 가지고 물놀이장을 만들어서 (국내) 최초로 (어린이 놀이터에) 물놀이장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걸 울산에 제안해서 현실화시킨 게 내가 했던 최초의 어린이 놀이터 물놀이장이고.

친환경 무상급식도 워낙 정치적 이념으로 대변됐던 것이어서, 내가 그때 한 20여 일 단식 농성하면서 (성취해 냈던 것인데), 울산에서 동구가 최초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하고 5학년까지 확대하는 일 등을 해 왔다. 그리고 우리 동구가 전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지원센터를 직영으로, 다른 곳은 위탁을 많이 하는데, 직영으로 하고 있고, 지금도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아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금까지는 아동의 생활에 집중했다면 이젠 문화·예술이다

Q. 앞으로 좀 더 들여다볼 분야는 무엇인가?

‘작은 도서관 운동’이 2000년대 초반에 ‘MBC 기적의 도서관 느낌표’ 프로그램 때문에 도입이 됐고, 나도 두 번째 의원 할 때는 네 개 정도를 만들고 나갔는데, 8년 만에 돌아오니까 똑같은 거야. 그대로. 더 늘어나지도 않고 역할이 더 다양하지도 않아.

그래서 최근에 우리가 서부동에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하나 만들었고, 이번에 청소년 전용 도서관을 고민하면서 서울 출장을 다녀왔는데, 복합 문화 공간에 대한 요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가보니 도서관에 책만 있는 게 아니라 음악도 있고 영상도 있고, 그다음에 바느질이나 요리나 청소년들이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게 다 있어서 동구에 있는 시설들을 복합 시설로 울산에 모범 사례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그리고 만들 때 전제 조건은 우리 동구에 있는 청소년들의 요구를 반영한 시설로 만들어야 하겠구나, 해서 준비를 하고 있다.

Q. 울산저널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울산저널 독자 여러분 반갑다. 나도 울산저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렇게 (지면과 영상으로) 만나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 나는 울산저널이 매일 나오는 신문이 아니다 보니까 소식이 밀려서 한 번씩 보게 돼서 그게 제일 아쉬운데, 아마 독자들이 다들 가지는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역에서 지역 언론을 키우는 일은 우리가 끝까지 놓치지 않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가 울산저널을 응원하는 정도라면, (앞으로) 더 많은 응원으로 울산저널이 더 자주 더 다양하게 울산 시민들에게 울산의 소식을, 다른 언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 입장에서 그리고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입장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만들고 함께 응원했으면 한다. 감사합니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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