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교로 지킨 신부의 순결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 - 기고]

2025-11-03

◆불꽃 속에서 피어난 에클레시아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입니다.”

18세 카타리나가 혹독한 고문 앞에서 고백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가진 귀족 여성인 그녀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부황제의 청혼까지 물리쳤다. 50명의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오히려 그들을 개종시켰다. 못 박힌 바퀴로 고문당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와 약혼했습니다. 그분은 나의 영광이요, 나의 사랑이며, 나의 달콤함이요, 나의 연인입니다. 어떤 고문도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많은 신도들이 이렇게 목숨을 바쳤다. 황제에게 향 한 줌만 피우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다. 왜일까? 그들은 자신을 ‘신부’로 여겼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향한 절대적 사랑과 순결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약 300년, 박해의 불꽃 속에서 신부 공동체는 더욱 순수하게 빛났다.

성령 강림, 신부 공동체의 탄생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에게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일어나 외쳤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날 약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자신을 ‘에클레시아’(Ecclesia)라 불렀다. 이 단어는 ‘밖으로 불러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세속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부름받은 특별한 공동체라는 의미였다. 그들은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믿음으로 연결된 ‘제2이스라엘 선민’이 되었다.

성령 강림은 구원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이 돌판에 새겨져 있었다. 법궤와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성령 시대는 달랐다.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렘 31:33)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이제 성령께서 직접 마음에 임재하시어, 신도들을 이끄셨다.

초대교회 신도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나누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재산을 공유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았다. 주로 신도들의 가정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추구한 순수한 공동체 정신과 세속과 구별되는 삶은, 중세 유럽의 신부신비가들과 근대 한국의 신령집단이 보여준 영성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신랑” - 동정 순교자들

그러나 순수한 신앙은 대가를 요구했다. 로마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통합하기 위해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다양한 민족의 신들은 인정했지만, 황제를 최고의 신으로 섬길 것을 명령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를 수용했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황제숭배냐, 죽음이냐”의 선택 앞에서 그들은 죽음을 택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그 시대 동정 순교자들을 대표한다. 그녀의 고백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었다. 자신을 ‘신부’로 여기는 정체성의 선언이었다. 순결은 육체적 순결만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의미했다. 변치 않는 사랑, 절대적 헌신을 뜻했다. 죽음조차 그들을 신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들은 육신의 생명보다 영적 순결을 더 귀하게 여겼다. 이는 마치 신부가 신랑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순결을 지키는 것과 같았다. 동정 순교자들의 절개는 신부로서의 절대적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신부’로서의 순교 정신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1940년대 한국 신령집단 여성들도 단순히 신앙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 자신을 ‘신부’로 강하게 자각하며 재림주를 맞이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김성도는 일제 말기 “일본은 멸망하고, 한국은 새 주님을 중심으로 세계 1등국이 된다”는 계시의 말씀을 전하다 투옥되었고, 출감한 지 석 달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성도의 뒤를 이은 허호빈은 억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7천 배 경배를 올리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였다. 공산 정권 아래 종교 탄압 속에서도 대동보안서에 갇힌 채 예수님의 신부라는 고백을 끝내 부인하지 않다가 6·25전쟁 직후 총살당하였다. 1,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신랑을 향한 신부의 마음은 같았다.

광야에서 피어난 영성의 꽃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박해는 끝났다. 신도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교회가 급속히 세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 권력과 결탁하고, 형식적 신앙이 퍼졌다. 순교할 기회를 놓친 이집트의 안토니우스는 고민했다. ‘어떻게 순수한 신앙을 지킬 것인가?’

그의 답은 광야였다. 270년경, 그는 사막으로 들어갔다. 세상과 단절하고 하루 7번 기도하며 금욕의 삶을 살았다. 순교가 육체의 죽음이라면, 수도는 자아의 죽음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순교’였다. 그의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이들이 광야로 향했다.

파코미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20년경, 그는 개인 은둔이 아닌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했다. 함께 기도하고 노동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영적 공동체였다.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구분하고자 했다. 세속과 구별된 삶을 통해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다.

도나투스파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박해 시기에 배교했던 성직자들이 평화가 오자 다시 복직하려 했다. 도나투스파는 반대했다. “배교자는 성직 자격이 없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비록 교회와 갈등을 빚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진지했다.

흥미롭게도 20세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라는 시험 앞에서 한국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동아기독교, 성결교회 등 일부 교단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해체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로 대표되는 이들은 투옥과 순교의 길을 갔다. 신령집단은 산과 들로 흩어져 은둔하며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했다. 광복 후, 교회 순수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지만, 이 과정은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신앙의 갈등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세속과 구별되는 영적 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는 후일 한국 신령집단이 기성교회의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순수한 영성을 추구했던 모습과 겹쳐진다. 시대는 달랐지만, 거룩함을 향한 갈망은 같았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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