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이 미국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새 교황에 선출된 8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성 마테오 사도 대성당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로버트 제이머슨 신부는 “제 평생에 이런 일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생애에서 ‘미국인 교황’이 현실화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는 제이머슨 신부만이 아니다. 이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온 신도 오드리 슈멜저도 “개인적으로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필리핀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정말 뜻밖이었다”며 “하지만 프레보스트 추기경도 훌륭한 선택”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2000년이 넘는 가톨릭 역사에서 첫 미국인 교황이 탄생하자 미 전역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들썩이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톨릭 신자를 보유한 나라 중 하나지만, 유럽 중심의 가톨릭 문화권에서 이어져온 ‘초강대국 출신 배제’라는 암묵적 관행 때문에 교황을 배출하지 못했다. 오랜 금기를 깨고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제 267대 교황에 오르자 미국 가톨릭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잇는 훌륭한 후계자 될 것”
가톨릭 신자인 제프 워드는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을 잇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길 기도한다”며 “충분히 그럴 만한 좋은 분”이라고 말했다. 제이머슨 신부는 “이제 우리는 교황이자 미국인의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저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특히 “새 교황이 ‘레오(14세)’라는 이름을 쓴 것을 주목해야 한다. 사회 정의를 중요시하는 강인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역대 교황이 전통적으로 자신이 쓸 이름을 고를 때는 같은 이름을 사용했던 전임 교황의 사목 방침을 존중하고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마테오 브루니 교호항청 대변인은 “새 교황의 이름 ‘레오14세’는 노동권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년)을 계승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레오13세는 1891년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 문제만을 다룬 ‘노동헌장(Rerum Novarum)’ 회칙을 반포해 현대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레오 14세 교황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시카고는 첫 미국인 교황을 배출했다는 자부심에 잔칫집 분위기다. 이날 낮 미사를 진행 중이던 시카고 대교구 주교좌 성당 ‘거룩한 이름 대성당’에서는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새 교황에 선출됐다는 소식에 축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새 교황 고향 시카고서 “교황 만세”
이곳에서 현장 학습 중이던 가톨릭학교 학생들은 “교황 만세(Long live the pope)”를 외치며 환호했다. 시카고 대교구 총대리인 래리 설리번 주교는 대성당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오늘은 시카고와 미국에 흥분되는 날”이라며 “시카고 방식은 함께 모여 믿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레오 14세 교황과 신학생 시절 함께 공부했다는 윌리엄 레고 시카고 성 투리비우스 성당 신부는 “내 동급생이 교황이 됐다”며 “그는 항상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미 언론 대서특필…지대한 관심
미 주요 언론은 홈페이지에 레오 14세 교황 선출 소식을 홈페이지 헤드라인에 올리고 새 교황이 걸어온 길과 각계 반응 등 관련 기사를 실시간 업데이트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레오 14세 교황의 둘째 형인 존 프레보스트는 ABC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항상 신부가 되고 싶어했다. 다른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직전 동생과의 통화에서 ‘나는 네가 첫 번째 미국인 교황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는데 동생은 ‘말도 안 된다. 그들은 미국인 교황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 글을 통해 “교황으로 선출된 프레보스트 추기경께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며 “정말 흥분되는 일이고 이 나라에 얼마나 큰 영광인가”라고 했다. JD 밴스 부통령 역시 “첫 미국인 교황 선출을 축하한다”며 “미국의 수백만 가톨릭 신자와 기독교인들은 교황이 성공적으로 이끌기를 기도할 것”이라고 했다. 밴스 부통령은 개신교도에서 2019년 개종해 미 역사상 두 번째로 가톨릭교도 부통령이 됐다.
레오 14세, 트럼프 이민정책에 부정적
하지만 새 교황 레오 14세는 그간 트럼프 행정부에 비판적인 메시지를 내곤 했다. 로버트 프레보스트라는 본명이 사용된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 계정에서는 2017년 당시 대선에 도전하던 트럼프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된 한 추기경의 WP 기고문이 공유돼 있다.
지난 2월에는 밴스 부통령이 불법 체류자 추방 정책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 이웃을, 그 다음에 공동체를, 그 다음에 동료 시민을 사랑하라”는 말을 기독교 교리라고 거론한 것을 두고 “밴스가 틀렸다. 예수님은 타인에 대한 사랑에 순위를 매기라고 하지 않았다”는 가톨릭 매체 기사를 공유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도 “장벽만 세우려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하는 등 트럼프 정부의 국경 장벽 강화 및 이민자 추방 정책을 여러 번 비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