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리 종이학과 화해

2025-12-01

지난달 13일 일본 도쿄의 한 커피숍. 마주 앉은 윤기(83)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이 명함 한장을 건넨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한국서 갈 곳 없는 고아들을 키운 목포 공생원 윤치호(1909~?) 선생, 윤학자(다우치 지즈코·1912~1968) 여사의 장남이다. 일본서 재일동포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 시설 ‘고향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최근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 욱일쌍광장(旭日双光章)을 받았다.

얘기는 자연스레 공생원으로 흘렀다. 전란 속,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부친이 돌아오지 못하면서 공생원 살림살이는 오롯이 윤 여사의 일이 됐다. 하루아침에 3000명이 넘는 아이들의 엄마가 된 윤 여사의 이야기는 NHK를 타고 일본에 알려졌는데, 이를 본 사람이 한일 교류 물꼬를 튼 ‘김대중 오부치 선언’으로 유명한 오부치 게이조 당시 총리였다. 병석에 누운 윤 여사의 “우메보시(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다”는 말에 오부치 총리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그는 고향 명물인 매실나무를 한국에 보냈고, 윤 여사는 한·일 수교 3년 뒤인 1968년 눈을 감았다.

2000년 4월 오부치 총리가 갑작스레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공생원 앞마당, 오부치 나무를 보고 자란 공생원 아이들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천마리 종이학을 접었다. 오부치 총리 아내는 아이들이 접은 학을 남편 병상 곁에 두었다. 남편이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병을 떨치지 못한 남편이 하늘로 떠나자 이번엔 아이들의 종이학을 관에 넣었다. “인연이었는가 봐요. 어머니 일본 이름이 지즈코(千鶴子), 오부치 여사 이름도 지즈코(千鶴子)로 같은데, 아이들이 보낸 것도 천마리 학(千鶴)이니까요.” 윤 이사장은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머니는 영웅이 아니라 보통 여성이었어요. 그런 어머니가 3000명이 넘는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목포 시민의 힘이기도 해요. 일본인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치를 정도였으니까요.” 그가 일본에 고향의 집을 연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삶의 끄트머리, 고향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란 생각에 김치도, 아리랑도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목표가 있다고도 했다. “공생원에서 이어진 한·일 인연들을 이어가 양국이 진짜 화해가 무엇인지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란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행사가 넘쳐났던 올해도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목포 공생원과 매실나무가 천마리 학과 일본 고향의 집으로 이어졌듯, 언젠가 이 인연들이 진짜 화해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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