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 사람 모여 사는 서울, 이제 서울말은 ‘융합과 포용의 말’

2024-09-25

최근 관심 끄는 서울 사투리…개그 소재 ‘했그등여’는 서울 토박이의 서울말이 아니라 서울에 사는 사람의 말

고정불변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해…급격한 산업화 과정서 수도권 팽창하며 각 지역 말이 뒤죽박죽, 서울말 변화 촉진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 드문 오늘날 서울말의 정의도 바뀌어야…즉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말’

뒤쥭박쥭, 이것은 200여년 전 서울에 살았던 40대 중년 사내의 편지 속에 담긴 말이다. 사내는 1752년에 태어나 1800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종로구 창경궁로 185번지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또한 종로구 율곡로 99번지에서 태어나 평생을 인근에서 살았으니 이 사내는 골수 서울 토박이이다. 그의 나이 열한 살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나 할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며 성장해 당대 최고의 독서가이자 이 집안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개인 문집까지 냈다. 활을 쏘면 50발 중 일부러 49발만 맞힐 정도의 명사수였으니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조선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24년간 수많은 업적을 남긴 이 사내를 우리는 정조대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문장에 통달한 이였으니 당대의 문체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데 문장에 대해서는 지독한 ‘꼰대’이자 ‘꼴보수’였다. 당시에 유행하는 자유로운 문체로 쓴 글을 패관잡문이라 하여 탄압하였고 박지원의 <열하일기> 문체가 잡스럽다 하여 죄를 묻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이런 그가 사적인 편지를 수없이 남겼다. 세손 시절에는 숙모에게 “가을바람에 기후가 평안하오신지 문안 알고자 바라오며”로 시작되는 귀여운 한글편지를 쓰더니 나이가 들어서는 신하에게 300여통의 한문 편지를 남겼다. 말술에 골초, 툭하면 격노를 일삼던 이 사내는 편지에 ‘胡種子(호로자식)’이란 표현을 주저 없이 쓰기도 했고 한문 편지 중간에 ‘뒤쥭박쥭’을 한글로 써 놓았다. 이런 그가 오늘날의 서울말을 보고 듣는다면 과연 뭐라 할 것인가?

‘했그등여’와 서울말

서울 사투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말, 특히 방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의 관심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관심이다. 인터넷상에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의 말까지 차례로 비교하며 그 변화 양상까지 상세하게 소개한다. 급기야 개그 프로그램에서 1990년대의 젊은이 말투에 나타난 특징을 생생하게 잡아내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서울말도 사투리의 하나라는 것, 서울말이 곧 표준어는 아니라는 것, 서울 사람들이 모두 표준어를 쓰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줘 고맙다. 맞춤법에 따라서 ‘했거든요’로 쓰지만 실제의 발음은 ‘했그등여’인 것에, 당연히 ‘하다’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주의 깊게 들어보니 ‘허다’인 것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서울말이 아니다. 방언 연구의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서울의 거리에서 인터뷰를 했을지라도 인터뷰 대상이 서울 사람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3대, 즉 100년 정도는 대대로 서울의 사대문 안에 산 사람의 말이어야 서울 토박이말이라 할 수 있다. 60대 이상이라야 하고, 교육은 많이 받지 않았어야 하며, 3년 이상 타지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의 말이라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인터뷰에 나온 말, 개그맨들이 포착해낸 말은 서울말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다. 또한 전통적인 기준으로 조사한 서울 토박이말과 부합하지 않는 것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는 서울말이다. 방언 혹은 사투리를 새로운 기준으로 정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방언을 ‘시골말’ 혹은 ‘표준어가 아닌 말’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집합의 개별 원소로 본다면, ‘이 땅의 모든 말’을 종합하면 곧 ‘한국어’가 된다는 시각에서 보면 그렇다. ‘그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끼리 널리 쓰이는 말이 곧 그곳의 사투리라고 보면 그렇다. 1990년대에 서울 거리를 활보하던 ‘젊은이’들이 ‘했그등여’라 말했으면 그것이 곧 서울 사투리이고 같은 시대를 사는 ‘늙은이’들이 ‘허다, 허구, 했에여’라고 말했으면 그것도 곧 서울 사투리이다.

서울말과 표준어의 역사

대한민국의 서울은 서울이다. 이 말이 가능한 것은 ‘서울’이 고유명사이자 ‘수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어원을 경주의 수도인 ‘서라벌’에서 찾기도 하는데 이 주장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경주도 서울이었다. 신라의 천년이 다한 후에는 오백년 동안 개경이 서울이었고 그 후에 육백년 넘게 서울이 서울이었다. 그러니 서울말은 특정 지역에 한정된 고정불변의 말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말이다. 이때의 ‘시대’는 ‘시간’이기도 하다. 왕조의 교체에 따라 서울말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시시각각 달라지는 언어의 속성상 당시의 서울에서 같은 시대를 나누어 사는 모든 세대의 말이 곧 서울말인 것이다.

한국어의 표준어는 서울말이 아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정립(鼎立)하고 있었던 때에는 경주, 부여, 평양 등의 말이 표준어였다. 삼국통일 후에는 경주의 말이 표준어의 기능을 하다가 이후 개경과 한양의 말이 표준어가 되었다. 경주와 개경은 거리상으로 꽤 멀지만 신라의 핵심세력이 고려의 건국에 대거 참여하면서 경주의 말이 개경을 중심으로 한 표준말에도 반영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에는 공식적인 표준어가 없었으므로 문자의 창제자이자 당시의 가장 높은 이였던 세종의 말이 표준 문어로 채택되었다. 세종의 할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었고 세종까지는 함경도 말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이니 최초의 표준 문어는 함경도 말이었다.

오늘날의 한국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만이 아니다. ‘주권을 잡은 로동계급의 당의 령토 밑에 혁명의 수도를 중심지로 하는 말’, 즉 문화어도 표준어이다. 이는 분단 이후 북녘에 세워진 정부를 인정하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반도의 북녘에서 쓰고 있는 말도 한국어라면, 그들이 공식적으로 표준어를 제정했다면 그것도 한국어의 표준어일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표준어인 문화어는 분단 이전의 규범을 바탕으로 하되 지역적, 정치적 특성을 반영해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어서 남녘의 표준어와 큰 줄기는 같다. 두 개의 표준어를 인정해야 한국어의 덩어리가 커지고 그래야 ‘이 땅의 모든 말’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뒤죽박죽의 서울말과 표준말

“지금처럼 벽파의 무리가 뒤죽박죽이 됐을 때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만 줄인다.” 18세기 서울의 중년 남자가 쓴 편지를 한글로 번역하면 이렇다. 편지 전체가 한문인데 화를 이기지 못해서인지, 이를 대신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인지 ‘뒤쥭박쥭’만 한글로 적어놓았다. 편지는 당쟁이 심하던 시기의 한 당파인 ‘벽파(僻派)’를 비난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서울말’로 바꿔도 무방하다. 비교적 정제된 문어(文語)를 두고도 문체반정을 일으킨 이였으니 문어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구어를 듣고는 ‘서울말 꼰대’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서울말이자 표준말인 경주말은 자료가 없어서 판단할 수 없으나 고려의 개경말은 분명히 뒤죽박죽이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개경 출신이었고 수도 또한 이곳으로 정해졌다.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이 지역 출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신라의 귀족들도 대거 고려의 건국에 참여하고 건국 후에 이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려의 서울말은 한반도 중부 지역의 말과 남부 지역의 말이 섞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부 지역의 말이 케이크의 빵처럼 바탕이 되고 남부 지역의 말이 크림이나 초콜릿처럼 덧씌워졌을 수도 있다. 혹은 쌀 반죽에 고물과 소가 조화를 이루는 떡처럼 여러 지역의 말이 다양하게 조합되었을 수도 있다.

조선의 서울 한양은 개경과 가깝기도 하고 조선의 건국 세력이 고려의 핵심 세력과 큰 차이가 없으니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서울말과 표준말은 큰 요동은 없었다. 다만 조선 건국의 주체가 함경도 출신이다 보니 함경도 말이 한글 창제 이후 초기의 문헌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함경도 말이 최초의 문어 표준어였을 것이기 때문에 초기 한글 문헌에는 중부 지역의 말에는 없는 성조가 표기되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에도 함경도는 여전히 변방이었고 이 지역의 인물이나 풍습 등이 서울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지 않았으니 함경도 말은 서울말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만큼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조선 건국 이후 서울말과 표준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호란과 왜란 등의 큰 전쟁이었다. 한반도의 중부까지 뒤흔들어 놓은 두 차례의 호란, 이보다 더 긴 기간 동안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왜란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 뿐만 아니라 각지의 말이 섞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땅의 사람과 말을 뒤섞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의 고향을 떠나 수도인 서울에 모여 살게 되었으니 한국전쟁 이후의 서울말은 훨씬 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1933년에 서울말을 기반으로 하여 제정된 표준어가 이후의 서울말과 달라지게 된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지의 사람들을 따라온 말이 서울말과 뒤죽박죽되니 서울말은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포용과 융합의 말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 및 수도권의 팽창은 서울말의 변화를 더더욱 촉진했다. 각지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다 보니 서울에는 서울 사람 아닌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서울이 점점 더 팽창하고 ‘수도권’이란 이름으로 더 많은 지역을 포괄하게 되니 서울 고유의 정체성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를 찾기가 어려운 상황, 서울로 이주한 이후 3대를 넘긴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서울 토박이의 정의도 애매모호해지는 상황이다.

이는 곧 서울말의 정의를 바꾸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대대로 서울에 살아온 토박이들의 순수한 서울말’이 아닌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말’이라 정의해야 실재하는 서울말과 일치하게 된다. 서울말을 이렇게 정의하게 되면 ‘뒤죽박죽의 말’이 아닌 ‘포용과 융합의 말’이 된다.

한 나라의 서울은 각지의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곳이다. 따라서 서울말에는 애초부터 많은 지역의 말이 녹아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을 표준어로 정해도 각지의 말과 두루 통하는 것이다. 전쟁이나 산업화로 인해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말이 서울말로 편입되어도 좋다. 그럴수록 서울말과 이에 바탕을 둔 표준말은 더 두루 통할 수 있는 말이 된다.

200여년 전의 그 사내가 지금의 서울에 온다면, 왕궁을 벗어나 서울의 골목을 누비며 산다면 그의 삶과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그 또한 ‘절친’을 만나면 ‘힙한’ ‘포차’에서 ‘쏘맥’을 마시며 ‘생파’를 하고 ‘오늘은 지 생일이그등여’라 말하며 ‘아재 개그’를 남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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