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내시’·‘비상한 천재’…‘대수장가’가 된 최고의 부자들 [지금, 옛것]

2025-12-07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사실로 관심이 높아질 때가 있다. 2021년 7월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을 일반에 처음 공개하던 때를 떠올려 보자. 코로나19 사태의 와중이라 관람 인원을 제한한 가운데 엄청난 예매 경쟁이 벌어졌다. 티켓 예매가 ‘방탄소년단 콘서트급’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출품작은 국보 12건, 보물 16건을 포함한 45건 77점. 최고의 인기는 단연 정선의 ‘인왕제색도’였다.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은 자체로 관람객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이건희의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문화재를 소장자와 결부시켜 바라보면 치열한 입수과정, 소장 당시의 다양한 에피소드, 소장자 개인의 인생사 등이 더해지며 흥미를 높인다. 많은 문화재를 가져 ‘대수장가‘라는 불릴만한 이들은 대개가 이건희 회장처럼 당대 최고의 부자라서 더욱 그렇다.

◆삼국유사 최고본(最古本) 품은 ‘마지막 내시’

지난달 30일 끝난 간송미술관 ‘보화비장’전은 지금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된 문화재를 갖고 있었던 7명의 컬렉션을 조명한 기획전시회다. 이 중 한 명인 이병직은 어디내놔도 꿀리지 않은 컬렉션은 이룬데다 특이한 이력으로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

이병직은 1937년과 1941년, 광복 후인 1950년 세 차례 경매회를 열고 자신의 소장품을 처분했다. 1937년 경매회에 429점, 1941년에 328점, 1950년에는 고서적 1500여 권을 내놓았다. 그의 컬렉션은 압도적인 양은 말할 것도 없고, 질적으로도 빼어났다. 회화만 놓고 보면 김두량의 ‘월야산수도’(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속의 ‘매조도’(간송미술관 소장), 장승업의 ‘홍백매십선병풍’(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은 각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삼국유사 권3∼5’는 이병직의 소장품이었다. 이병직은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던 이인영이 6·25전쟁 당시 서울로 피난을 와 집을 마련하기 위해 처분할 때 구입했다.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라는 점에서 막대한 가치를 가진다. 현재 전하는 여러가지 판본 중 삼국유사 권3∼5는 간행 시기가 가장 빠르다. 국가유산청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 7년(1512)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병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내시 중 한 명이었다.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유재현의 손자뻘로 내시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계보를 이룬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혔다. 7살 때 사고로 “‘사내’를 잃은 불행은 그가 막대한 자산가가 되는 계기였다. 강원도 홍천의 7000석꾼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재력은 젊어서부터 유명했다. 잡지 ‘삼천리’ 1940년 9월호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당시 최고 부자인 광산왕 최창학의 1년 소득이 24만원, 화신 콘체른의 박흥식이 20만원, 간송미술관 설립자 전형필이 10만원, 인촌 김성수가 4만8000원인데 이병직은 3만원 내외라고 소개했다.

재산을 교육에 적극 투자했다는 점은 두드러지는 또 다른 이력이다. 고향인 경기도 양주 가납공립초등학고, 양주중학교에 토지와 건물, 설립 기금을 쾌척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해 운영한 전형필과 비슷한 면모다. 소장품을 처분한 것도 교육 자금 마련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2번이나 입상한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가장 사실적 매그림 소장한 ‘비상한 천재’

심사정의 ‘황취박토도’는 조선시대 매그림 중 가장 사실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막 사냥을 끝낸 매는 날개를 다 접지도 않은 채 날카로운 발톱으로 토끼를 움켜지고 노려보고 있다. 특히 뾰족하게 서 있는 목덜미의 털은 사냥의 숨가빴던 순간을 그대로 전한다.

“매사냥 그림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이 그림은 한 때 박창훈의 수중에 있었다. 1938년 한 전람회 기록에는 김덕영 소장으로 되어 있어 이후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박창훈은 1940년 자신의 이름으로 개최한 경매회에 최북의 ‘금강전도’, 김정희의 글씨 ‘침계’ 등과 함께 이 그림을 내놓았다.

그는 “비상한 천재”로 불린 인물이었다. 보통학교,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에 뽑혀 일본 교토제대 유학을 해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적 수완도 뛰어났다. 의사로 성공한 뒤 여러 회사의 경영진, 주요 학교 후원회장을 지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다 이만한 성공을 거두었으니 일제강점기 ‘개천에서 난 용’의 대표격이라고 해도 좋겠다.

박창훈은 명품 컬렉터로 유명했으나 ‘반면교사’로도 꼽힌다. 소장품을 ‘처리’한 방식 때문이다. 그는 1940년, 1941년 두 차례 경매회를 열어 소장품을 모두 처분했다. 두 차례 경매회에 출품한 작품 수는 600점이 넘었고, 당시 언론이 “조선 초유의 성황”이라고 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박창훈은 처분의 이유를 자녀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고, “선대에 못 가졌던 복을 많이 가져 중요 미술품까지 점유할 염치가 없다”며 짐짓 겸손한 척도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세계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재산 축적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당시는 일본, 독일이 전선을 확대하면서 세계대전의 기운이 급격히 높아지던 때였다. 김상엽은 자신의 책 ‘미술품 컬렉터’에서 “‘다량 수집 후 전량 매매’라는 유례없는 미술품 처리 방식은 투자의 대상으로 고미술품을 인삭한 경우”라며 “고미숦품 소장 활동을 민족문화 애호나 고미술품에 대한 애착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기에는 의구심이 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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