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턴가 ‘좋은 아빠’가 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감정을 공감하고, 무기력해 보이지 않으며,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부드럽고, 똑똑하고, 재밌기까지 해야 한다. 요즘 아빠는 거의 육아계의 슈퍼히어로다. 영화에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도 이런 스펙은 못 찍는다.
내가 어렸을 적에 좋은 아빠라는 단어 없이 그냥 아빠였다. 퇴근하고 오면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사회생활에 지쳐 늘 힘들어하셨고, 주말이나 휴일에는 우리와 노는 것보단 TV를 보시거나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한마디 하면 “공부 열심히 해라!” 한마디였다.
지금은 다르다. 아이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아빠, 학습지 숙제를 안 보면 무관심한 아빠, 그림책을 안 읽어주면 비협조적인 아빠가 된다.
요즘 육아는 마치 매일 업데이트되는 스마트폰 OS처럼, 늘 새 기준과 기능이 추가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아빠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처음에는 나도 열심히 따라가 보려고 했다. 그림책을 읽을 땐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 얘기했고, 잠자기 전에 꼭 안아주며 “사랑해”라고 말하려고 애썼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화가 나더라도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아빠 역할이 나란 사람을 점점 압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좋은 아빠가 되고 있는 걸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방식이 맞는 걸까?’ 가끔 혼자 있을 때면 이런 질문들이 속에서 조용히 떠오른다. 물론 아빠가 된다는 건, 선택이 아니라 결심이다. 그리고 그 결심에 기꺼이 많은 걸 내려놓는 일이 포함되어 있음을 안다.
아이가 아프면 모든 일정이 멈추고, 퇴근 후에도 육아가 기다린다. 아이의 하루를 물어보고 관심을 표현해주고, 감정을 살펴준다. 다만, 그 모든 노력에도 자꾸 불안감이 다가온다.
세상은 끊임없이 아빠들에게 더 나은 아빠가 되라고 말한다. 아이는 감정 코칭이 필요하고, 엄마는 공평한 육아 분담을 요구하고, SNS 속 다른 아빠들은 주말마다 캠핑을 가고 해외로 여행을 간다. 나는 그들의 삶에 비해 뭔가 빠져 있는 것 같고, 늘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말한다. “아빠. 어디 힘들어? 내가 도와줄까?” “아빠. 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 한마디가 나의 머리를 세게 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육아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아이 옆에 조용히 있었을 뿐인데, 아이에게는 그게 좋은 아빠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기준이란 것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만들어진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늘 가까이에 있었고,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은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게 아니라 매일 아이의 눈높이에 서서, 작게라도 진심을 아이와 나누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족함이 많은 것을 안다. 인내심도 길지 않으며, 화가 날 때도 많다. 휴일에는 나 혼자 누워 있고 싶다. 그럼에도 아이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아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듣고 싶어서.
매일 매일 나는 갱신해가고 있다. 좋은 아빠가 아닌,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참으며, 조금 더 따뜻해지는 아빠로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기준이 계속 올라가는 세상 속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아빠’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류민수 펜을 든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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