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우연과 불운이 겹쳐 만들어 낸 미제사건

2025-11-28

20년간 미제로 남아있던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마침내 밝혀졌습니다. 경찰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망자의 DNA까지 확보해 대조하는 등 끝까지 추적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범인에게 법의 심판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경찰이 피의자로 지목한 장모씨는 2015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장씨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지만 그의 흔적은 아직 이승에 남아있습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뒤에도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며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A빌딩에서 계속 관리인으로 일했습니다.

지난 26일 장씨가 일했다는 A빌딩을 찾아가 봤습니다. 큰 특색 없이 수십 년째 자리를 지켜온 건물입니다. 장씨는 이 건물에서 또 다른 범행을 저질렀다가 결국은, 사후에 꼬리가 잡혔습니다.

평범한 그 거리의 A빌딩···연쇄살인 벌어진 곳일 줄은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장씨는 2006년 2월 A빌딩 관리인으로 일하던 중 20대 여성을 흉기로 위협해 금품을 뺏고 성폭행하려다 체포됐습니다. 다행히 여성이 완강히 반항하면서 범행은 미수에 그쳤고, 장씨는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장씨를 특정한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 장기미제팀은 장씨가 살인사건 피해자들에게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범행을 했을 것이라 봅니다. 두 명의 시신 모두에서 모래와 곰팡이가 발견되는 등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또 장씨가 검거된 사건처럼 범행일이 공휴일이었습니다.

A빌딩에는 지금 병원도 식당도 있었습니다. 20년 전 두 명의 여성이 사망하고 한 명의 여성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곳이지만 지금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이도 알고 있는 이도 없어 보였습니다. 건물 앞에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길을 걷는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사망한 이들도 이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렸을 것입니다.

장씨가 시신을 유기한 곳도 그대로였습니다. 인근의 상점 중에는 당시와 같은 상호를 유지한 곳도 보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골목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입니다. 주차 단속이나 방범용으로 설치된 이 CCTV가 20년 전에도 있었다면 장씨를 바로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범행을 저지를 마음을 먹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두 건의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도 20년간 그의 범행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엄청난 수법으로 수사를 어렵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시신을 엉성하게 유기했습니다. 누가 그의 모습을 보았다면, 유전자 증거가 없었다 해도 그는 더 빨리 체포됐을 것입니다. 미제로 남은 많은 살인 사건들은 영악한 지능범이 아닌 수많은 우연과 불운이 겹쳐 만들어진 것일지 모릅니다.

경찰이 2006년 2월 장씨를 검거하고도 인근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 사건과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두 건의 살인 사건에 대해 경찰 내부의 전문가들은 연쇄성 범죄로 보았지만, 동일범의 유전자 정보 같은 증거가 없었습니다. 경찰은 신정동에 거주하거나 근무하는 동종 전과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장씨의 주거지는 경기도 부천이었습니다. 그는 강간미수, 주거침입, 절도 등의 전과로 실형을 산 전력이 있었지만 신정동 거주자가 아니라 주요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타지역에 거주하면서 신정동에서 일하는 동종 전과자는 파악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상 신정동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의 신상을 파악해두거나, 전과자의 행적을 전부 따로 관리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또 당시 장씨의 범죄는 미수에 그쳤습니다. 경찰에서는 범죄자를 검거하면 그의 수법을 따로 정리해 관리하는데, 이때 그의 범행 수법을 성폭행이 아니라 강도로 분류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선 성범죄와 연관이 있는 두 건의 살인사건을 장씨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 했을 수 있죠. 어떤 경우라도, 지금으로선 범인이 다른 범죄로 체포된 시점에서 여죄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장씨는 체포 직후 금품을 뺏으려 했다며 성폭행 의도를 부인하다가, 다시 성폭행하려고 했지 금품을 뺏으려던 건 아니라고 하는 등 오락가락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장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그에게 적용된 성폭력처벌법상 특수강도강간 등 혐의는 사형·무기징역·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무거운 죄입니다. 하지만 미수범인 데다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법관이 재량껏 형을 감경하는 정상참작감경(작량감경)이 적용됩니다. 최소 10년의 징역이 두 번 감경된 것이죠.

당시는 알 수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재판부는 이미 두 명을 죽인 살인범의 형을 감경해주었죠. 장씨는 감경된 징역형도 너무 무겁다며 항소합니다. 항소는 기각돼 확정됐지만, 그가 출소 후 검찰이 청구한 위치추적장치 부착 청구는 기각됐습니다. 장씨는 2009년에 출소하면서 자유가 됩니다.

출소 후 그가 형사 재판을 받은 기록은 없습니다. 그리고 1년여 지난 2010년 7월 강력사건 범죄자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보관하는 DNA법이 시행됩니다. 그의 징역살이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소급 적용되는 DNA법에 따라 그의 유전자 시료도 채취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기술이 발달한 2020년에는 장씨의 범행이 드러났을지 모릅니다.

물론 2020년에도 장씨는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족들에 조금 더 빨리 진실을 알릴 수는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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