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도록 이어진 취미는 인생의 동반자와 같다. 김수영(46) 씨에게는 보드게임이 그렇다. 10대 시절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1000원짜리 작은 보드게임에 마음을 빼앗겼다. 보드게임 유행이 일었던 대학생 시절 보드게임 동호회에 가입해 친구를 사귀었다. 결혼 후에는 보드게임으로 아이 둘을 교육했다. 매년 10월 독일 에센(Essen)에서 열리는 국제 보드게임 전시회인 ‘슈필(Spiel)’에 참가하기 위해 결혼 10주년 여행지로 독일을 골랐을 정도다. 김 씨의 인생과 늘 함께한 보드게임은 이제 인생 2막의 업(業)이 됐다. 그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것만으로 나는 성공한 덕후(매니아)”라며 웃었다. 30년 차 보드게이머 경력이 어떻게 직업이 됐는지 그 사연을 들어봤다.
김 씨는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외국계 IT 기업에서 테스트팀 리드이자 소프트웨어 품질 인증(CMMI associate) 담당자로 21년을 일했다. 올 1월 퇴직한 것은 수년간 그를 괴롭힌 허리디스크 때문이다. 통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퇴직 후 4개월 동안은 누워만 지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보드게임 지도자 자격증 취득이다.
“처음엔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누워서 할 만한 것들을 찾았죠. 보드게임은 평생 해왔던 취미라 자격증을 쉽게 취득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전동 침대로 몸을 일으켜 누워 온라인 수업을 듣고 보드게임 지도자 자격증 1급을 취득했어요.”
허리가 괜찮아지자 핸드드립과 필사 등 평소에 관심이 있던 강의를 들으며 본격적으로 퇴직 이후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의 중장년 생애전환교육 ‘인생디자인학교’다.
“사실 큰 목표 없이 입학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또래 중장년들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세우고 열정적으로 도전하더라고요. 동기부여가 됐어요. 저도 ‘보드게임 강좌 열기’라는 목표를 세우고 복지관과 지역센터의 문을 두드렸어요. 운 좋게 이달부터 성북구의 한 생활예술문화센터에서 강의하게 됐지요.”
일본에서는 은퇴 후 동네 지인을 사귀며 주거지에 적응해 나가는 것을 ‘지역 데뷔’라고 한다. 김 씨의 주 생활지는 회사가 있는 강남구였다. 퇴직 후 주 생활지가 된 성북구에서 그는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에게 강의 개설은 지역 데뷔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1년 동안 한 회사만 다녔더니 모든 인간관계가 회사 중심이었어요. 퇴직 후 관계가 제일 큰 고민이었죠. 매번 친구들 만나러 전 직장 찾아갈 수도 없잖아요. 강의에서 보드게임 편하게 함께 할 동네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도 컸지요.”
보드게임은 카드나 주사위, 나무판 등을 사용해 진행하는 게임이다. 나무 조각으로 세운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 조각을 하나씩 걷어내는 게임 ‘젠가’, 과일이 그려진 카드를 뒤집어 펼치고, 판에 깔린 카드 속 과일과 합이 5개면 종을 울리는 ‘할리갈리’가 대표적인 보드게임이다. 주요 플레이어는 아이들과 청년층이지만 신체 제약이 없고, 두뇌 훈련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최근 중장년이나 시니어를 위한 게임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운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보드게임도 많아 게임을 즐기는데 나이나 숙련도는 상관이 없다.
이러한 보드게임은 중장년에게 특히나 좋다고 김 씨는 생각한다. 게임 규칙을 익혀야 하니 기억력 향상과 치매 예방에 좋다는 게 김 씨의 생각이다. 진행자로서 규칙을 설명해야 해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도 갖추게 된다. 다른 참가자가 실수하면 교정해 줄 수 있는 관용도 필요하다. 순서와 규칙을 지켜 플레이하니 경청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 놀이가 끝난 후에는 다 같이 보드게임판을 정리하니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재사회화 교육과도 같다. 승패와는 상관없이 전략적으로 머리를 쓴다는 점만으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그중 김 씨가 제일 주목한 장점은 짧은 시간 동안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정의하는 보드게임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시간과 장소, 물건을 공유하는 일’이다.
“중장년이 되면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잖아요. 웃으면서 만난 사람과는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데, 보드게임이 그 역할을 하는 거죠.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게 하는 게 보드게임이 가진 힘이에요.”
그가 보유한 보드게임은 ‘하루에 하나씩 해도 1년을 채울 수 있는 정도’다. 그런 그가 추천하는 보드게임은 무엇일까. 김 씨가 가장 즐기는 게임은 ‘아그리콜라(AGRICOLA)’다.
“우베 로젠버그가 만든 보드게임이에요. 그가 만든 보드게임은 농업이나 조선소 등 평범한 산업 현장이 배경이에요. 아그리콜라는 농민의 삶을 살아보는 게임인데, 귀농이 궁금하다면 해볼 수 있겠지요. 플레이어와 교류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에요.”
둘이서 천 조각을 이어 하나의 완성판을 만드는 ‘패치워크’, 진행자의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려보는 ‘듀플릭’, 지도 위에 기차를 놓으며 미국, 스위스 등을 여행해 보는 ‘티켓 투 라이드’, 청각만으로 주사위가 떨어진 층을 맞추는 ‘모드 임 아로사’, 호텔 주식을 사들이고, 합병하는 ‘어콰이어’ 등 도저히 하나만 추천할 수 없다며 열거한 보드게임만 10가지가 넘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보드게임이 있어요.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는 쉬운 보드게임도 많아요. 눈빛만으로 하는 보드게임도 있는 걸요.”
김 씨는 아직도 보드게임만 생각하면 문방구에서 보드게임을 처음 발견했던 소녀처럼 설렌다. 인생 2막의 꿈도 보드게임 페스티벌에 다시 참가하는 것이다. 보드게임 시장 규모가 큰 일본에 가보고 싶어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다. 그는 취미가 가져다주는 설렘과 일상의 기쁨을 다른 중장년들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드게임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독서모임과 비슷하다고 여겨주세요. 보드게임도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가 붙는 엄연한 ‘출판물’이거든요. 은퇴 후 생활 터전이 바뀐 분이나 대화할 친구가 필요한 분은 보드게임에 꼭 도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