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막바지에 바람이 불어온다.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일용 엄니’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김수미 씨의 별세 소식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향년 75세, 그녀의 별세 소식은 ‘스타를 잃었다기보다는 가족을 잃은 것 같은 슬픔으로 다가온다.’라고 추모한 유인촌 장관의 말처럼 내게도 그랬다. 더더욱 내가 받은 충격이야말로 절실함을 넘어 절박함으로 다가왔다. 물 위에 뜬 낙엽처럼 엄마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별세 소식처럼 무언가 나를 툭 치거나 슬쩍 쓰다듬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 그것이 머리나 등에 떨어지는 나뭇잎일 수도 있고 창을 통해 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지나가는 바람이기도 하다. 우산 없이 흠뻑 맞은 소나기일 수도 있고 새들의 지저귐일 수도 있다. 또 우두커니 멍하고 있다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일 수도 있고 책을 읽다 훅, 가슴을 치고 들어온 한 문장일 수도 있다. 영화나 비디오를 본 후에 받는 보너스나 뜻밖의 쿠키영상처럼 얼마 전, 엄마로부터 날아든 메시지가 생각난다.
“우리딸잘있어요사히엄마가좀궁굼하다” 구순을 지척에 둔 엄마가 톡, 톡 마음 문을 두드렸다. 참깨를 털어내듯 카톡새가 보채듯 울어댔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답하지 않았다. 수십 통의 전화에도 부재중인 딸내미가 영영, 한세상 부재로 남을까 봐. 극에 달한 걱정이 격정으로 내달렸으리라. 객지로 떠난 아들과의 불통을 경험한 후였다. 띄어쓰기도 쉼표도 마침표 하나 없이 전보처럼 띄운 엄마의 문자, 그 속내가 내게로 온전히 전해오는 듯 그제야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를 기다리게 한 그 시간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장마 속이었다는 것을….
수심은 제 수심의 깊이를 모른다. 고작 몇 센티미터의 출렁임을 위해 온 우주가 숨죽인 듯 고요한 시간, 두류공원으로 저녁 산책을 나선다. 지나치는 사람들 대부분 등산로 끝에 자리한 호수 앞에서 잠시 멈춰 서더니 호수 속 자신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을 투영해 본다. 이어폰을 낀 채, 눈이 시리도록 한자리 그대로 앉아 찌가 흔들리기를 기다리는 낚시꾼처럼 표정을 살핀다. 편안이 평안에게 평안이 편안에게 서로 등을 기댄 듯 묘한 평안과 편안함이 전해온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거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거나 눈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 모든 풍경이 황홀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우리를 찾아온 지금이 유턴하듯 머지않아 왔던 길을 되돌아 떠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십일월은 그렇게 왠지 애틋한 결말을 뻔히 다 아는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고 말하는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그 끝을 알기에 순간순간 더 몰입하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장 한 장 두고두고 아껴가며 읽는 시집이나 책처럼 그렇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사는지도.
가을밤, 호숫가의 물멍이 창밖을 고요히 내다보는 일과 맞닿아 있다. 어둠 속 가로등 아래로 흐르는 불빛에 비친 사람들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 안, 번잡하게 들려오는 소음들을 다독인다. 휴지통처럼 마음을 텅 비운다. 물고기가 번뜩, 물 위로 떠오른다. 은유를 낚아챈다.
‘불파만(不파慢), 지파참(只파站)’,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라’라는 중국속담처럼 삶이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를 때라는 걸 짐작으로 헤아려 본다. 우리네 삶의 다양한 풍경처럼 핑계 없는 무덤 없듯,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을 받아들인다.
내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젠가. 가장 나답게 자유로운 순간은 또 언제일까. 빡빡 숙제하듯 두 자루의 볼펜을 한 손안에 거머쥐고 막바지에 든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내 모습으로 빛날 수 있을까.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시월 어느 날, 가을 역에서 우연처럼 만난 누군가의 별세 소식은 호수처럼 내 삶의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투영해 볼 수 있었던 필연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희뿌연 안개 걷히듯 밤하늘 별들이 초롱초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