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하림이 국가기관 주최 행사에서 갑작스러운 섭외 취소 통보를 받은 후 심경을 전했다.
하림은 14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음악가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며, 몇 권의 책을 들쳐보고, 서점 계단에 앉아서 정리한다. 이것으로 작은 소동이 마무리되길 바란다”며 장문의 글을 게시했다.
그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행사에서 갑작스럽게 섭외 취소 통보를 받았다”며 “작년에 광장에서 노래를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밝혔다.
하림은 “행사 포스터까지 확정됐고, 좋은 취지라 낮은 개런티에도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던 자리였다”며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제가 거리에서 노래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불편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어 “블랙리스트가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작은 행사까지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비슷한 경험이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때마다 조용히 물러났다. 실무자들이 상처받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그렇게 조용히 넘겨온 일들이 우리 모두의 입을 닫게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림은 “이번에는 동료들과 후배들도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장을 밝힌다”고 전했다.
하림은 음악가의 사회적 발언이 정치적 행동으로만 해석되는 현실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음악은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며 “슬픔에 반응하고 연대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조차 쉽게 ‘정치적’이라는 이름 아래 프레임에 갇힌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하림은 “우리는 모두 조금씩 약자의 자리에 서 있다”며 “음악은 그런 우리에게 잠시 쉴 곳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음악이 칼도 방패도 아닌, 그저 음악일 수 있기를 꿈꾼다”고 전하며 글을 마무리했다.
하림이 언급한 행사는 통일부가 주최하는 행사로, 이번 취소 결정에 대해 통일부는 14일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우려한 결정”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앞서 하림은 지난해 12월 탄핵 촉구 집회 무대에 노래를 불렀다. 이를 두고 ‘가수는 노래만 하라’는 일부 여론의 비판에 “어이없다”며 반박하기도 했다.
다음은 하림 SNS 글 전문.
음악가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며, 몇 권의 책을 들쳐보고, 서점 계단에 앉아서 정리합니다. 이것으로 작은 소동이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1. 이것도 블랙리스트입니까?
계엄의 상처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이 시점에, 며칠 앞으로 다가온 국가기관 주최 행사에서 갑작스럽게 섭외 취소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작년에 광장에서 노래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사 내용도, 이미 확정된 포스터도 있었고, 좋은 취지의 행사라 낮은 개런티에도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제가 거리에서 노래했다는 그 사실이 여전히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한때 실재했다고 알려진 블랙리스트가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설사 간간이 해온 활동때문에 제 이름이 어딘가에 올라 있다 하더라도, 소극장에서 열리는 작고 가난한 행사까지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도 결국은 어느 한 중간관리자의 눈치 보기에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직적인 탄압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두려움의 구조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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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그런이유로 취소 통보를 받았는데도 가만히 있었나요?
사실 비슷한 일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따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통보를 전하는 이들은 대부분 갓 기획 일을 시작한, 책임지기 어려운 위치의 실무자들이기 때문입니다.그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고, 저 역시 그냥 갑자기 생긴 휴일을 기분 좋게 보내는 것으로 대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히 넘겨온 일들이 우리 모두의 입을 닫게 만드는 것을 언젠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도 처음엔 기록으로만 남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노래했던 동료와 후배들도 저와 같은 입장에 놓일 수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이 이야기를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싸움이 되지 않도록, 상처 주지 않도록, 그러나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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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악가의 발언은 정치적 행동인가요?
음악가들이 사회적 사건에 목소리를 내는 일이 꼭 정치적인 활동은 아닙니다. 저는 많은 음악이 결국 동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오랜 시간 슬픔을 달래고, 마음을 모으는 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때 노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요즘은 정치적으로 보이는 일과 실제 정치적인 것의 경계가 아주 모호해진 시대입니다. 슬픔에 반응하고, 연대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조차 쉽게 ‘정치적’이라는 이름 아래 놓이며 프레임에 갖히곤 합니다.
간혹 정말로 음악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분들도 있지만, 음악가들의 모든 표현을 정치로만 해석하려는 언론의 시선은 음악이 할 수있는 다양한 좋은 일들을 억누르기도 합니다. 케이팝가수도 인디가수도 재즈 연주자도 모두 그런 일을 합니다. 그 일은 주로 좋은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그 에너지 안에서 관객과 음악가들은 서로를 사랑합니다.
예전 광화문에서 노래하러 간다고 했을 때, 어떤 분이 “하림님 이름으로 오뎅차라도 보내드릴까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담 너머 어르신께도 드릴 수 있다면 저도 받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추위와 허기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요. 그 제안은 웃음과 함께 거절되었지만,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미 구호와 깃발이 넘치는 자리에서 노래하는 순간만큼은 모두 안전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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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씩 약자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음악은 그런 우리에게 잠시 쉴 곳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음악가들은 책을 읽고, 가사를 쓰고, 악기를 연습하며, 노래라는 작은 방패를 닦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꿈꾸고 있습니다. 음악은 칼도, 방패도 아니기를요.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뿐’인 음악이 누군가에게는 젊은날의 전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 음악이 전부인 친구들 누구도 낙엽처럼 정치적 이슈에 쓸려 다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동을 기록합니다. 부디 이번 일을 계기로, 음악이 더 안전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