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20일 육군 부대 찾아 신년 연설
“유럽, 미국에 안보 의존 말고 깨어나야”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날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자국군을 상대로 행한 신년 연설에서 ‘자주 국방’을 강조했다. ‘미국 우선주의’을 앞세우며 동맹국을 무슨 짐짝처럼 취급하는 트럼프에 맞서 프랑스 등 유럽의 독립성을 굳건히 지켜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20일(현지시간) AP, AFP 통신 등에 따르면 마크롱은 이날 프랑스 서부의 육군 부대를 찾아 신년사를 했다. 그는 장병들을 향해 “만약 우리의 동맹인 미국이 지중해에서 군함을 철수한다면 우리 유럽은 무엇을 할 것인가” “미국이 대서양의 전투기를 태평양으로 이동시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질문을 던졌다. 이어 “유럽은 더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지 말고 깨어나야 한다”며 “그러려면 국방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트럼프는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을 겨냥해 “국방 예산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으로 증액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마크롱의 말은 ‘트럼프의 압력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유럽 스스로 안보를 위해 방위비를 늘리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프랑스는 2024년부터 2030년까지 방위 분야에 4130억유로(약 617조원)의 예산을 투입키로 했는데, 이는 동서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폭의 국방비 증가에 해당한다.
마크롱은 트럼프 2기 행정부 등장으로 부쩍 커진 국제정치의 불확실성에 유럽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그는 “1년 전만 해도 그린란드가 국제적 논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느냐”고 말했다. 트럼프가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미국이 차지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을 겨냥한 셈이다. 덴마크가 유럽연합(EU) 회원국인 만큼 그린란드는 EU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 필요성을 외쳐 온 트럼프는 앞으로 두 나라 간 평화 구축에 진력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우크라이나가 이미 영토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빼앗긴 상황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면 우크라이나한테 매우 불리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를 내놓는다. 이 점을 의식한 듯 마크롱은 “(트럼프의 바람과 달리) 전쟁이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무기를 지원해 탄탄한 방위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향후 평화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트럼프의 취임과 관련해 마크롱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지난달 7일 트럼프가 당선인 신분으로 파리를 방문했을 때 유럽 정상들 가운데 처음으로 트럼프와 만나 축하의 뜻을 전한 바 있다.
반면 다른 유럽 주요국 정상들은 트럼프 행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앞다퉈 발표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영국과 미국은 공동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미국은 독일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고 강조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미국과 유럽의 대화에서 이탈리아가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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