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죽신’의 시대, 구축에 산다는 건

2024-09-27

로망 바르고 취향 채운다

날 닮은 공간 삶이 숨 쉰다

‘신축 20평대 vs 구축 30평대’

부동산 관련 커뮤니티에 종종 등장하는 단골 테마다. ‘평수를 줄여서라도 신축을 사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내집 마련을 앞둔 많은 이의 끝없는 딜레마로 남아 있다. 깨끗한 인테리어, 여유로운 주차장과 최신식 커뮤니티 시설, 가치 상승 가능성 등 신축아파트의 장점은 차고 넘친다. 최근에는 ‘얼어 죽어도 신축’, 즉 ‘얼죽신’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그러나 집을 ‘사는(BUY) 곳이 아니라 사는(LIVING) 곳’으로 정의한다면 구축은 차선책이 아닌 최선책이 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넉넉한 평수에서 여유 있게 생활할 수도, 저마다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인테리어로 공간을 재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죽신’의 시대, ‘구축(인테리어)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공간을 들여다봤다.

오랜 벗처럼 편안한 오래된 아파트

열네 살 노견 마크와 함께 사는 40대 김우씨는 유독 구축아파트가 끌렸다. 외벽부터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도색된 신축아파트보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구축의 조경이 좋았고 따뜻한 햇볕을 온전히 받는 구축만의 특혜인 발코니 공간을 어떻게 꾸밀까 상상할 때면 즐거움에 피식 웃음이 나곤 했다.

“외부인은 경계하는 경비원의 매서운 눈초리부터 지하주차장에서 현관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밀번호, 신식 기계와의 기싸움까지 요즘 신축아파트들은 진입장벽이 높잖아요(웃음). 감수해야 하는 불편한 점이 많더라도 저에게는 온정이 느껴지는 구축아파트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작은 동네 부동산에 발 도장만 찍던 김씨는 오랜 기다림 끝에 30년 차 20평대 복도식 아파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지척에 천변 산책로가 있고 발코니 너머로 벚꽃길이 펼쳐지는, 오랜 벗처럼 편안한 집이었다.

“어설프게 인테리어가 된 집보다는 오히려 인테리어가 하나도 되지 않은 구옥이길 바랐어요. 반려견과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했고, 어린 시절 제 마음대로 주무르던 찰흙처럼 이것저것 시도하며 저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집을 완성하고 싶었거든요.”

김씨는 거실보다 넓은 안방은 리빙룸 겸 침실로, 주방과 연결된 거실은 다이닝룸으로 디자인했다. 주방에선 상부장과 후드를 없앤 자리엔 선반과 작은 장을 달았고 싱크대 하부장은 키에 맞춰 높이를 조절했다. 다소 밋밋해 보이는 공간에는 노란색과 민트색으로 포인트를 줬다.

그의 아이디어로 ‘용도 변경’을 한 공간도 있다. 기존 세탁기가 놓여 있던 다용도실이다. 수전을 설치하고 조명을 달아 변신한 이 공간은 현재 건식 파우더룸으로 활용 중이다. 속옷이나 부피가 작은 옷을 손빨래하기에도 유용한 ‘밀실’이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나 차단기 좀 없으면 어때요. 그 덕에 경비 아저씨랑 인사 한 번 더 할 수 있고 오히려 좋던데요? 저는 여전히 구축을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어요. 외관은 허름하고 투박한데 (리모델링한) 속은 화려한 이 반전 매력은 오직 구축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거잖아요. 특히 최근 건설사의 부실시공 뉴스를 접할 때마다 튼튼한 구축아파트라 다행이다 싶어요.”

☞ 인테리어 팁 구축 인테리어를 할 땐 나만의 평면도를 그려봐도 좋겠다. 본인의 취향과 원하는 스타일을 직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업체와의 미팅 시에도 수월하게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0년 차 주부 정은경씨(36)는 스물일곱,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모아둔 자금도, 집을 보는 안목도 없었던 정씨 부부는 한동안 부모님 곁에서 생활하며 ‘우리’ 집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마주한 집은 20년 차 구축, 전용면적 59㎡(25평형)의 아파트다.

좁은 공간, 한정된 예산이라는 장벽을 깨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정씨는 마치 “출제자의 의도를 벗어나 나만의 방식대로 문제를 풀어내는” 수험생처럼 공간을 재해석했다. 그 결과 지금의 ‘삼무(三無) 하우스’가 탄생했다. 첫 번째 ‘없음’은 공간의 이름이다.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요리와 제빵을 즐기는 저희 부부에게 주방과 거실이 턱없이 좁더라고요. 주방이 곧 거실이 되고 거실이 곧 안방이 되는 공간을 만들어 효율성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 주방의 기능을 갖춘 동시에 때로는 카페로, 거실로, 영화관으로 변신하는 카멜레온 같은 공간이 완성됐죠.”

흔히 안방으로 사용되는 큰방 역시 시시각각 변신이 가능한 ‘부부 라운지’로 꾸몄다. 햇살이 가장 잘 드는 방을 잠만 자는 공간으로 두기에 아깝다는 판단에서였다. 공간의 경계와 함께 사라진 두 번째 ‘없음’은 문이다. 현관과 화장실을 제외한 공간에 문을 떼어내니 갑갑함이 해소됐다. 개방감이 더해져 실평수보다 넓어 보이는 효과도 생겼다.

“신축아파트는 아무래도 구조를 크게 변경하는 경우가 드물고 정해진 공간에 물건을 배치하는, 즉 ‘채움’ 인테리어가 주를 이루지만 구축아파트에는 채움은 물론 대대적인 변화까지 구현해낼 수 있잖아요. 머무는 사람의 개성과 창의력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화 가능하다는 잠재력이 구축만의 매력 같아요.”

마지막 없음은 ‘큰 가구’다. 정씨의 집에는 자리를 차지하는 큰 식탁이나 소파가 없다. 이동이 쉬운 가벼운 가구들, 러그와 소품으로 그때그때 스타일링을 하는 편이다. 처음 계획했던 ‘아늑한 분위기이되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위해 부부는 여전히 ‘인테리어 중’이다.

정씨는 임장을 다니면서 아파트의 연식이 오래될수록 조용하고 주변 상권이 잘 형성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입주 초기부터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비롯해 동네 선배들에게 구전으로 전수받는 ‘맛집’ 정보도 쏠쏠하다.

“구축에서 산다는 말을 다르게 곱씹어보면 그 지역의 ‘헤리티지’를 누릴 수 있다는 말 같아요. 때론 따뜻하고 구수한 지역의 유산을 누려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 인테리어 팁 ‘숲세권’과 같이 천혜의 뷰를 가진 집이라면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접이식 폴딩도어를 설치해 공간 분리를 하는 것을 제안한다. 발코니는 발코니대로 활용하면서 확장 효과를 줄 수 있다. 이때 발코니 바닥을 내부와 같은 소재로 시공하면 더욱더 자연스럽다.

네 마리 반려묘와 함께 지내는 40대 주부 이애경씨의 주방은 특별하다. ‘각이 안 나와’ 인테리어 의지를 꺾게 하는 전형적인 판상형 구축아파트 주방임에도 ‘열 팬트리 부럽지 않은’ 수납의 기술이 돋보인다. 세 번의 이사, 세 번의 인테리어로 쌓은 안목과 실력 덕이다.

“신축, 대단지 아파트를 가고 싶던 저와 달리 남편은 구축아파트를 원했어요. ‘사람 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이유였죠. 집값의 차액만큼 인테리어를 하기로 하고 이 집을 사는 것에 동의했어요. 만약 새집이었다면 이렇게 제 마음대로 뜯어고치지 못했을 거예요.”

“주방 재공사를 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토스터와 커피 추출기를 제외한 모든 가전을 싱크대 하부에 숨겨뒀어요. 덩치 큰 에어프라이어는 실용적이지만 꺼내두기엔 부담스러운데 이렇게 수납해두고 쓰면 주방이 깔끔해지고, 공간의 여유가 생겨서 좋더라고요. 밥솥과 에어프라이어는 슬라이딩 선반을 이용해서 앞으로 당겨 사용해요. 열기 때문에 싱크대가 손상될 염려도 없죠.”

똑같은 크기의 주방이지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배가 됐다. 이씨는 “구축은 공간 활용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좁은 집이 될 수도 넓은 집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대공사가 힘들다면 ‘잉여 공간’을 활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씨의 경우 안방과 거실 발코니에 붙박이 수납장을 짜 넣어 체감 평수를 넓혔다.

“구축아파트는 비포·애프터가 정말 확실해 결과에서 오는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 같아요. 집에 오시는 분들마다 ‘이 아파트에 이런 집은 이 집 하나뿐’이라고 칭찬해주시는데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더라고요(웃음).”

☞ 인테리어 팁 구축아파트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편안함이 우선돼야 한다. 유행을 따라 디자인한 집은 쉽게 질린다. 가족의 취향을 반영하고 동선을 고려한 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시행착오 역시 내집을 만드는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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