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부터 '스파이'가 소원…KGB 요원 푸틴, 이런 모습이었다

2024-11-23

[제3전선, 정보전쟁] 스파이 출신 푸틴의 정보전

지난 10월 19일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실린 기사 하나가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푸틴의 스파이들이 세계적 혼란을 획책하다’라는 제목 아래 최근 러시아 정보기관이 서방의 내부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방화, 사보타지, 거리폭력 등을 감행하며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기사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통상 정보 관련 기사라면 익명의 정보당국자 말을 인용하기 십상인데, 이 기사에는 영국·독일·네덜란드의 정보수장들이 줄줄이 실명으로 등장했다. 영국 국내정보 수장인 MI5의 켄 맥컬럼 국장과 해외정보 수장인 MI6의 리차드 무어 국장, 독일 국내정보 수장인 토마스 할덴방 헌법보호청장과 해외정보 수장인 BND의 브르노 칼 국장, 그리고 노르웨이 정보국의 닐스 스텐슨 국장까지 직접 나서 러시아의 공격적 행태를 경고했다. 독일 BND의 칼 국장은 러시아의 비밀활동이 전례 없는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음을 강조했다.

“요원 한 명이 수천 명 구할 수 있다”

기사 제목에 ‘푸틴의 스파이’(Putin’s spy)라고 한 부분도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의 정보수장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굳이 ‘푸틴의 스파이’라고 한 것은 푸틴이 러시아 스파이들의 실질적 대장이며 러시아의 공격적 정보전이 푸틴의 생각과 지시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 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푸틴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그런 분석과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푸틴은 흔치 않은 스파이 출신 국가지도자다. 10대 때부터 스파이를 꿈꿨다는 그는 대학 졸업 후 1975년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들어갔고, 1985년 동독 드레스덴에 파견돼 활동했다. 1997년엔 KGB의 후신격인 연방보안국(FSB) 국장에 올랐다. 정보 마인드가 남다르다.

푸틴 자신도 스파이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2006년 12월 정보의 날 기념식에서 “한번 정보요원은 영원한 정보요원”이라고 말한 데서 그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스파이 경험이 대통령직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수시로 말해 왔고, “정보요원 한 명이 수천 명의 운명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동독에서의 스파이 활동이 푸틴의 정보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냉전의 최전방인 동독에서의 실전경험 과정에서 정보전이 국익과 국가안보에 매우 중요함을 체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시절 푸틴은 서방의 첨단기술 수집, 드레스덴 공대에 유학중인 외국인 포섭, 동독 정보기관인 슈타지와의 정보협력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했다. 더 중요한 경험은 동독과 소련 연방의 붕괴를 현장에서 지켜본 것이다. 1980년대 후반 국력이 약해진 소련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의 소련 이탈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고,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소련 연방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푸틴은 미국과 함께 세계질서를 양분했던 소련 연방이 무기력하게 해체되는 아픈 과정을 현장 요원으로 지켜봤다. 푸틴은 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한순간 국가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푸틴의 경험은 정보 철학의 자양분이 돼 역대 지도자들과는 다른 실용적 정보전략을 낳았다. 푸틴은 체제수호와 공산주의 확산을 중시했던 전임자들과 달리 러시아의 안전 수호를 최우선 안보과제로 삼고, 이 임무의 중심에 정보기관을 배치했다. 1998년 7월 FSB국장 취임시 “FSB는 국가안보의 핵심기관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나, 2016년 정보안보독트린과 2021년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하면서 “정보는 현대 국가안보의 핵심영역이며 국가의 생존 문제”라고 강조한 것은 푸틴이 현장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정보 철학을 드러낸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군사독트린과 2015년 국가안보전략에서 정보전과 사이버전을 공식 전략수단으로 채택했다. 서방에 비해 종합 국력이 열세인 만큼 비용대비 효과가 큰 정보전·사이버전으로 극복하겠다는 속내가 담겨있다. 이처럼 정보전을 안보전략의 중요한 수단으로 격상시킨 것은 푸틴이 스파이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푸틴의 정보전략은 크림반도 합병과정에서 명징하게 드러났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반러 세력이 충돌하자, FSB는 동부와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봉기를 유도하고, 이를 핑계로 아무런 표식이 없는 러시아군을 투입해 크림반도를 장악하도록 했다. 이어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장악을 정당화하는 대규모 여론전을 펼쳤다. 여론정보전이 성과를 보이자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에 관한 주민투표를 붙였고, 기대한 대로 절대적 찬성을 이끌어냈다. 적의 내부혼란을 조성한 뒤 군사·정보 혼합전을 통해 신속한 해결을 도모하는 푸틴식 전략이 크림반도 합병작전에서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푸틴의 정보전략은 나날이 발전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내부분열까지 도모하는 수준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주로 서방의 개방된 민주주의 제도와 정치체제의 약점을 공격해 내부분열을 증폭시켜 스스로 붕괴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그림자 전쟁이다.

푸틴의 스파이들은 저비용의 사이버,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상대의 정치, 군사, 경제를 공격하는 새로운 정보전을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적극 돕고 있는 폴란드에 대해 최근 러시아 해커들이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시도한 게 대표적 예다.

최근에는 사이버 여론전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영향력 정보전을 선보이고 있다. 선거 민주주의 제도의 약점을 공략해 여론분열을 조장하고, 상황에 맞게 공격목표를 수시로 변경해 상대가 대응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푸틴의 스파이들은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분열과 혼란을 조성하기 쉬운 것이 우리의 최대 무기”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미국은 경각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에이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지난 5월 러시아의 정보전에 대해 단순히 미국의 분열을 노린 정도가 아니라 미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2013년 발간된 『미스터 푸틴』의 저자이자 서방에서 푸틴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로 평가받는 피오나 힐 전(前) 미 NSC 러시아 국장은 푸틴에 대해 스파이 출신답게 정보전에 능수능란하며, 과거 소련의 정보전이 군사, 외교를 ’지원‘하는 차원이었던 데 비해 오늘날의 러시아 정보전은 (’지원‘을 넘어) 곧 외교정책이자 군사정책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러 북 정보 분야 밀착 면밀 주시해야

푸틴의 정보 전략은 강한 공격성을 띠면서도 경제·외교·군사력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비용대비 효과가 큰 정보전을 새로운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제도화 단계로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3년 발표된 러시아의 외교정책전략 비공개 부록에는 “미국과 유럽에 대응하기 위해 정치, 군사, 경제적 수단은 물론 정보전과 심리전도 공세적으로 전개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의 공격적 정보 활동은 강건너 불이 아니다. 푸틴의 스파이들이 한반도에서도 공격적 정보전을 획책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시해야 한다. 올 3월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국장이 평양을 방문하는 등 러·북 밀착이 정보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다. “앞으로 푸틴의 스파이들이 선을 넘는 경우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는 이코노미스트지의 경고는 이 같은 우려를 더욱 증폭시킨다. 당국의 철저한 대비를 기대한다. 정치권도 관계 당국이 잘 대비할 수 있도록 관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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