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2.5배 늘리니 한 달 내내 SMP 마이너스…"전력망 개선해야"[Pick코노미]

2025-08-07

“막 물건을 납품받았는데 전기가 나가 당황했습니다. 다음날 상한 유제품과 해산물 6000유로어치(약 1000만원)를 그냥 버려야 했습니다”

지난달 29일 바르셀로나 레 코트구의 슈퍼마켓 콘디스를 운영하고 있는 아우구스틴 마르티네즈 씨의 하소연이다. 스페인 대정전 당시 차단된 전기가 10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아 상당수의 상품을 폐기했다는 이야기다. 콘디스 인근에서 식자재 가게를 운영하는 안토니아 로드리게즈 씨 역시 “하필 마련해뒀던 비상 발전기도 작동하지 않아 하루 장사를 공쳤다”며 “21세기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자영업자들만 손해를 본 것이 아니다. 교통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출퇴근하는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바르셀로나 병원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테네사 카야 씨는 “버스가 전혀 움직이지 못해 마지막 2km 정도는 걸어서 출근했다”며 “퇴근한 뒤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오랜만에 촛불을 켰다”고 회상했다. 택시 기사로 수 년간 일했다는 에릭 고메즈 씨는 “그날 바르셀로나 거리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며 “신호등이 다 꺼져 경찰들이 급히 교통 통제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바르셀로나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한 기업 주재원은 “정전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슈퍼마켓에서 사재기를 하더라”며 “정신이 퍼뜩 들어 뭐라도 사러 갔는데 정작 현금이 없어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고 전했다. 스페인은 카드 결제가 원활해 사람들이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는데 그날 이후 비상금을 지참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는 후문이다. 카탈루니아 폴리테크닉 대학교에서 해양과학기술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다이아나 레온 씨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집에 라디오도 새로 샀고 비상 식량도 비축해뒀다”며 “아직도 정부가 정확한 원인을 밝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스페인에서 사상 초유의 블랙아웃(대정전)이 일어난 배경에는 2000년대 중반 진행된 재생에너지 ‘과속’ 보급 대책이 있다. 스페인 정부는 2004년 태양광과 같은 청정에너지를 보급한다는 목표 아래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발전 사업자들은 25년 동안 높은 고정 가격에 전기를 팔 수 있도록 보장받았고 이에 따라 전 세계에서 태양광 사업자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빗대 ‘태양광 골드러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스페인의 태양광발전 설비용량은 이 시기 급격히 늘어 현재의 재생에너지 쏠림 구조를 만들었다. 현재 스페인의 태양광발전 설비용량은 34.7GW로 대형 원전 35기분에 달한다. 2020년만 해도 태양광발전의 설비용량은 14GW에 불과했는데 4년만에 2.5배 뛴 것이다.

대정전의 원인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용량이 급증한 데 비해 이를 감당할 전력망이 충분히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4월 28일(현지 시간) 발생한 스페인 대정전은 스페인 서남부 엑스트레마두라주의 한 발전소에서 갑자기 출력이 0으로 떨어지면서 시작됐다. 1.5초 뒤 같은 현상이 한 번 더 발생하자 이상 현상을 감지한 프랑스 측이 스페인과의 전력 연결선을 차단했다. 전력망을 보호하기 위한 자동 조치였다. 이와 함께 스페인 전력망의 주파수와 전압이 크게 흔들리자 여러 발전소들이 잇따라 전력망에서 자동으로 분리됐다. 단 5초 만에 당일 스페인 전력 생산량의 60%에 가까운 15GW의 전력이 전력망에서 증발했다.

그런데 대정전 당일 스페인에서 전기는 부족하기는커녕 오히려 넘쳐났다. 스페인은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용량 비중이 전체의 66%에 육박하는데 봄철에는 태양광의 효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실제 스페인 전력공사인 레드일렉트리카는 대정전 발생 12일 전인 4월 16일 하루 동안 100% 재생에너지만으로 전력 수요를 충족했다는 공식 발표를 내기도 했다.

문제는 전체 발전량이 전력망이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 균형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스페인에서는 지난해 이후 봄철 태양광발전량이 급증하면서 전력도매가격(SMP)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력 시장을 관리하는 이베리아전력거래소(OMIE)에 따르면 2023년만 해도 봄철(3~5월) SMP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경우가 전혀 없었지만 2024년에는 142시간 동안 SMP가 음수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올해 들어 404시간으로 급등했다.

올해 스페인 전력 도매시장에서 마이너스 SMP가격이 처음 나타난 날은 3월 22일이다. 이후 4월에는 22일간 마이너스 SMP 가격을 보였다. 5월에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SMP 가격이 0 아래로 떨어졌다. 마이너스 SMP 가격은 통상 2~4시간 정도 유지되는데 그치지만 5월에는 10시간 이상 지속되는 날도 6일에 달했다.

SMP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면 발전사는 전기를 팔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에 시장 참여 유인이 떨어진다. 이 경우 일부 발전소가 전력망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져도 대체 사업자를 구하기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있다, 전력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마이너스 SMP는 전력 수요공급 관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신호 중 하나”라며 “재생에너지는 깨끗하지만 의존도가 너무 커지면 전력망 불안정성도 같이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충분한 송전 시설을 확보하거나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같은 보호 방안을 갖추면서 재생에너지를 늘려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버터(전기 변환 장치) 방식의 태양광발전소 비중이 높아졌는데 이를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도 스페인 대정전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수력·화력·원자력발전소는 터빈을 돌리기 때문에 전력망에서 탈락해도 터빈이 서서히 멈추며 일정 시간 전기를 공급한다. 이상 현상에 대처할 시간을 벌어준다는 이야기다. 반면 태양광발전소는 인버터로 통제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한순간 전력망에서 분리돼 전력망 부담을 가중한다. 태양광·풍력발전 시설을 늘리는 데만 치중하고 전력망을 보강하지 않아 문제가 불거졌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한국에서도 이 같은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10%를 넘긴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30년까지 20% 선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마련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계획대로 집행될 경우 2038년 태양광·풍력발전소 설비용량은 117.9GW로 올해(37GW)보다 3배 이상으로 불어난다.

전문가들은 만약 우리나라에서 스페인식 대정전이 발생할 경우 훨씬 더 피해가 클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도체·철강·화학 등 고(高)전력 제조 기업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한 임원은 7일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이 멈춰설 경우 손실이 하루 최소 수백억 원에 이를 것”이라며 “삼성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국내총생산(GDP)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 정전 당시 경제 손실이 하루 4억 유로(약 6500억 원)로 추산됐는데 한국은 이보다 더 피해가 클 수 있다는 의미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제조업 중심 국가인 한국에서 대정전이 난다는 것은 스페인과는 다른 의미”라며 “특히 반도체 설비의 경우 정전 전후 생산 물량을 폐기해야 하는 것은 물론 장비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철강·석유화학 역시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굉장히 중요한 업종”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제철소나 석화단지에는 자체 발전소를 설치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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