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반도체 산업이 ‘반도체 제국 재건’에 나선 미국과 ‘반도체 굴기’에 속도를 높여가는 중국의 양면 공세에 밀려 진퇴양난에 빠졌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정부와 국회가 일치단결해 급변하는 글로벌 시대 흐름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대응 방안을 속도감 있게 마련해야 할 때다. 그러나 ‘K반도체 신화’ 재연을 뒷받침해야 할 당정은 이념의 늪에 빠져 ‘반도체 특별법’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 10일자 보도에 따르면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2㎚(나노미터·10억분의 1m) 웨이퍼 양산에 돌입했다. 최선단 공정이 적용된 팹52 공장을 언론에 공개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의 미국 내 2나노 양산 시점은 일러야 2026년 말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룬 쾌거다. 미국 정부는 8월 자금난에 빠진 인텔의 지분 10%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9월에는 엔비디아가 인텔에 50억 달러(약 6조 9000억 원)를 투자해 지분 4%를 확보하고 데이터센터와 PC용 반도체 칩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과거 화려했던 ‘반도체 명가(名家)’ 지위를 되찾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의기투합하는 모양새다. 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경쟁력을 끌어올리면 고객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반격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중국의 거센 추격이다. 중국은 반도체 전용 펀드를 조성해 2014년부터 10년간 이미 135조 원을 투입했다. 올해에는 투자 속도를 더 높여 반도체 장비에만 52조 원을 쏟아붓는다. ‘중국 제조 2025’에 이어 반도체 육성을 최우선 순위에 둔 후속 전략도 마련하고 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우리 당정은 ‘먼 산 보듯’ 태평하기만 하다.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주52시간 예외는 여전히 해법을 찾지 못했다. 올해 4월 패스트트랙에 태워진 반도체 특별법 처리도 요원하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육성을 위해서는 안정적 전력 공급이 기본인데 원전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 1호 공약으로 반도체 지원을 내걸며 “글로벌 경제 패권은 누가 반도체를 지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 말이 공언(空言)이 되지 않게 하려면 미국·중국을 압도할 만큼 빠르고 강한 정책·입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