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전지 업체 에코프로비엠 설비기술팀의 배문순(53) 직장(職長). 에코프로는 그를 사내 ‘명인(名人)’ 1호로 선발했다고 12일 밝혔다. 의료기기 업체에서 일하다 2015년 에코프로에 입사한 그는 사내 ‘문제 해결사’로 통한다. 에코프로 관계자는 “배 직장은 관련 부서 임직원을 모아 문제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토론의 달인”이라며 “충북 오창 공장을 건설할 당시 설비 구축에 기여했고, 단기간 내 제품 수율을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명장·명인을 선발하는 경우가 있지만, 중견기업은 드문 사례다. 그만큼 기술직을 우대하는 풍토가 제조업체 곳곳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명장을 발굴해 우대한 선구자는 포스코다. 포스코는 2015년부터 뛰어난 기술뿐 아니라 사내 모범이 될 만한 인품까지 겸비한 기술직을 선발해 예우하고 포상하는 ‘포스코 명장’ 제도를 운용해왔다. 매년 2~4명만 선발할 정도로 ‘바늘구멍’이다.
지난해 연말 인사에선 2018년 명장 출신으로 처음 임원에 오른 손병락 기술위원이 상무급에서 전무급으로 승진해 화제가 됐다. 손 위원은 고졸 신입으로 1977년 입사했다. 제철소 핵심 설비인 전동기 분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2000년 포항제철소 2공장 화재로 전동기가 손상됐을 당시 일본 기술진은 수리에 6개월 걸린다고 예상했다. 그가 나서 4일 만에 해결한 일화로 유명하다. 2022년 태풍 힌남노로 침수 피해를 본 포항제철소 복구 작업을 주도한 공로도 인정받았다.
이 밖에도 삼성전자가 2019년부터 20년 이상 일하며 장인 수준의 숙련도와 노하우, 실력을 갖추고 리더십까지 겸비한 인재를 선발하는 명장 제도를 운용해왔다. 격려금과 추가 수당은 물론이고 정년 이후에도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삼성 시니어 트랙’에서 우선 선발하는 혜택을 준다. 삼성은 지난 6일에도 15명을 올해 명장으로 선발했다.
LG화학도 최고 수준의 현장 기술자에게 포상금을 주고 진급 시 우대하는 등 명장 제도를 2022년 도입했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명장이 상징하는 현장 전문성과 기술력이 뒷받침돼야 고객이 만족하는 품질을 제공할 수 있다”며 “성취감을 중시하는 MZ(1980~2000년대생) 세대 기술직 특성에 맞춰 명장 육성 제도를 정교화하겠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2023년부터 반도체 장비 유지·보수를 맡은 현장 직군에서 최고 등급인 ‘마스터’를 신설했다. 마스터에겐 정년도 없다.
명장을 키우는 건 최고급 기술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현장직의 사기를 올려 인력 유출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다. 이 때문에 최고위급인 ‘C 레벨(임원급)’에서 과거 득세하던 ‘재무통·기획통’ 대신 ‘기술 통’ 약진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삼성전자 전영현·한종희 부회장을 필두로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도 SK이노베이션·HD현대·한화 등 제조업이 주력군인 대기업에서 기술 통이 최고경영자(CEO)로 두각을 드러냈다.
한국HP와 홈플러스 등 대기업에서 최고인사책임자(CHRO)를 지낸 최영미 이화여대 특임교수는 “기술 ‘무한 경쟁’ 시대로 접어들며 인사관리(HR)에서도 현장·기술 경험이 풍부한 전문 인력을 중용해 생산에 안전을 꾀하고, 미래기술·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이어 “최근 이공계 우대 바람이 불고 있는데, 현장 기술직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