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⑱ 휴식”

2024-09-28

긴 휴식, 삭막한 사회적 인간으로의 성숙

휴일이라는 게 아무리 길어도 지나고 나면 그 시간이 짧게 여겨지기 마련인데, 이번엔 넉넉하게 참 잘 쉬었다. 뇌에 머리카락 한 올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구토할 만큼 일에 쫓겨만 오다가, 잤다. 그냥 내리 잤다. 웬만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했고, 처리해야 할 문서가 있어도, 잤다. 틈만 나면 잤다. 아마 내 인생 통틀어 이러긴 처음일 거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더 힘들게 이어질 일정들을 위해 언제나처럼 전쟁을 앞둔 장수와 같이 서재를 꼼꼼하게 정리했고, 해야 할 일들을 원자단위까지 쪼개어 계획하고 또 계획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일 중독이었던 것 같다. 20대 중반의 어느 날이다. 늘 그랬듯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며칠을 밤샌 뒤 밤 11시쯤 침대에 누웠다. 그날은 엄청 더웠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더니 새벽 1시쯤이었다. 만족스럽다 싶다가 어둠 속에서 핸드폰의 날짜가 이틀이나 지나 있는 걸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스물여섯 시간을 시체처럼 내리 자고 한 시간쯤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평균 예닐곱 시간을 자도 충분했을 일인데 왜 그렇게 내 몸의 단백질을 축내면서 무모한 억지를 부렸는지 모르겠다.

최근 허리 디스크와 목 디스크가 아우성을 쳐도 죽자고 일했는데, 자고 또 자고 일 아닌 일을 쉼 없이 하고 또 해도 안달했던 상황은 어떻게든 굴러갔고, 조금씩 밀리긴 해도 몸과 마음이 죽을 만큼 힘든 것보단 더 나았다. 그래봤자 하루 평균 여섯 시간을 자고, 안마기에 좀 더 자주 올라갔을 뿐 개밥은 더 정성스레 챙겨줬고, 개 산책을 좀 더 부지런히 좀 더 멀리 좀 더 오래 했으며, 개들과 좀 더 많이 놀아줬다.

그사이 내 감정은 기복이 심했다. 참고 참았던 어떤 이들과 상황들의 염치없음에 대하여 깊은 배신감이 들었고,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으로 금세 회복하길 반복했다. 뇌의 디스크 조각을 정리하면서 쓸모없는 캐시 파일들을 모두 삭제하기 위해 애썼다. 여기저기 작은 쉼터와 여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머리와 마음은 신도시처럼 매끈해졌는데 어딘가 모르게 삭막해졌다. 몇 달간의 질풍노도 끝에 조금 더 사회적 인간이 된 것 같다.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전문성에 관하여

다큐멘터리가 됐든 극영화가 됐든 책이 됐든 뭐가 됐든, 자료조사와 함께 관련 전문가의 인터뷰는 필수다. 최소한 난 그렇다. 과하다 싶을 만큼 흡수하지 못하면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뭘 알아야 설계하고 구조를 짜서 글을 쓰고 영상으로 짜 맞출 수 있다. 그래서 난 어느 지점까지는 언제나 느리다.

박사 과정 때 대학원장의 한국 영화정책 수업 시간이었다. 석사 때부터 내 지도교수였다. 한 학생이 랩톱으로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이며 다른 과제를 하고 있었다. 교수가 눈치를 챈 듯했다. 나도 오랫동안 학교에서 그런 건 많이 봤으니 그럴 수도 있다 했지만, 난 좀 다른 지점에서 많이 놀랐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괘씸한 언행을 보였는지는 사족으로 밀어놓더라도 그 행태가 나에겐 한편으로 신선했고 다른 한편으로 기가 찼다. 짜깁기. 타 논문들을 다 읽지도 않고 대충 잘라 붙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엄청난 천재가 아니라면 나쁜 인간이다. 난 여전히 그런 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식의 과제에 많은 교수가 점수를 잘 줬다는 사실이다. 아, 이만큼 읽고 연구했구나……쯤 되려나?

난 스스로 천재라 여긴 때가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범재임을 인정하고 과거에 교만했다는 것을 안다. 부끄럽거나 후회하거나 반성하거나 그런 건 없다. 다들 그러지 않나? 그래도 그 누구와 그 어떤 내용의 인터뷰를 진행하더라도 그 지식이나 발상에 관하여 별로 놀라지 않는다. 찾아보는 수고를 덜어줬음에 고마울 뿐. 그런데 최근 반구대 관련한 인터뷰를 이어가면서 자주 감탄한다. 그 인터뷰이들은 학자이기도 하고, 연구가이기도 하며, 반구대 주민들이기도 하다.

모두가 국보 반구천암각화에 집중할 때 난 그곳을 기반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역사적, 행정적 지식보다 문화적, 심리적 접근이 중요하다. 그래서 해답이 없고 어렵다. 연출자의 진실에 관한 태도와 기획 및 연출 의도가 조심스러운 장르이다. 그 가운데서도 갈등에 집중했다. 그 갈등이 해결되는 장면이 대미를 장식해 주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풀지 못한, 선행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근데 왜, 그리고 무엇을, 그래서 어떻게.

인터뷰와 취재 과정에서 주민들이 펄떡이는 신선한 재료를 던져줬다면 연구가들은 잘 손질한 재료를 보기 좋게 정리해 줬고, 학자들은 그 재료들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의해주었다. 때로는 보기만 해도 즐거웠고, 때로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고, 때로는 음식을 마주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만큼 전율이 올랐다. 전문가의 힘이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누적해 오고 다져왔을 그 지식을 나눠준 모든 인터뷰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기록한다.

장비를 다시 장만하다

내 작업실에는 두 평 남짓한 공간을 분리해 창고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체코 진주알과 비즈공예 관련 물품들이 있다. 울산에 오고 난 이듬해였다. 평소 갖고 싶은데 비싸서 갖지 못한 체코 진주가 있었다. 체코 진주로부터 탄생한 스와로브스키보다 더 비쌌고, 색감이 훨씬 더 묵직하다. 종로에 있는 체코 진주 업체가 폐업하면서 홈페이지를 폐쇄한다는 공지가 있었다. 바로 전화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진주를 내가 모두 구매하겠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픽업트럭을 몰고 바로 친구네서 하루 묵은 뒤 이른 아침에 종로로 갔다. 한국에서 비즈공예 시장이 위축되어 일본으로 모두 이전한다고 했다. 그 사장은 체코에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한 푼도 깎지 않을 테니 줄 수 있는 건 모두 담아 달라. 내가 구매한 금액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내려왔다. 구경하러 같이 나온 친구가 그 사장과 짐을 다 실었다. 힘센 여자다. 당시 진주알이 58만 알쯤 됐다. 크리스털이나 기타 등등은 헤아리기도 지쳤다.

용인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너무 무거워서 차가 내려앉을 것 같았고, 양재동 화물센터에서 화물트럭을 불러 먼저 보낸 뒤 룰루랄라 내려왔다. 경주로 가는 트럭을 잡은 덕에 무척 싸게 보냈다. 집에 풀어놓고 보니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반투명 용기를 수백 개 샀다. 분류해서 담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고, 색상과 크기별로 정리하니 보기에 너무도 좋았다.

구슬이 있으면 실이 있어야 하는 법. 구슬과 실이 있으면 꿰는 도구가 필요한 법. 장담하건대 웬만큼 도구는 다 만져봤고 가지고 있다고 장담한다. 이사할 때든 내 작업실에 오는 사람이든 보는 이마다 묻는다. 장사해요? 아뇨. 갖고 싶어서요.

두 번 다시 장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결국 사버리고 말았다. C 카메라 회사에서 특별회원을 대상으로 엄청나게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꼬임에 넘어간 것만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이 회사의 기획전을 훑어봤는데 결국은 오차범위가 무척 좁은 다 비슷비슷한 가격이다. 얄팍한 상술이고 얄팍하게 부화뇌동하는 소비자 1인이다. 이젠 영화용 대형 드론을 사기 위해 드론 자격증을 땄다. 촬영 감독이 제 것을 쓰라고 한다. 뭘 믿고. 어쨌든 열심히 연습한 뒤 상황 봐서 급수를 높여 가야지.

비즈공예를 독학하면서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걸 구분할 수 있게 됐듯 촬영 장비와 조명, 녹음 장비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번에 마련한 장비들은 몹시 마음에 든다. 하이엔드가 아니라서 조금 아쉬움은 있지만 내 수준에 딱 맞다. 기능이든 무게든.

시나리오가 드디어 나왔다

파동과 섬세함이 아쉽지만, 기승전결의 형태를 제법 잘 갖췄다. 그래. 선수가 이래야지. 작가는 나의 지적과 모니터 결과로 마음이 많이 상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잘 만들어냈고, 바통을 이어받을 각색 작가는 한편으로 아쉽고 한편으론 부담을 덜었을 거다. 여기까지 오면서 난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숙했다. 전문성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장비를 골라낼 줄 알게 됐다. 긴 연휴 동안 충분한 휴식도 취했다.

자…… 이제 다시 뛰자.

이민정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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