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바흐, 혼자 일하기 좋아하고 쌀쌀맞고 거만했던

2025-02-06

1750년 어느 교회의 성실한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 지휘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돌팔이 안과 의사에게 백내장 수술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발생한 합병증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살아생전에 직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예배 중 오르간으로 특이한 화음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또 연주가 너무 길었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았다(물론 즉시 지나치게 짧게 연주하는 것으로 반항했다). 소문에 의하면 너무 혼자 일하기를 좋아하고, 쌀쌀맞고 거만했다고 한다. 어디에도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격무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도시에 있는 네 군데 교회 모두에서 음악과 연주를 담당했다. 매주 예배를 위한 칸타타를 하나씩 작곡해야 했고 심지어 연주도 지휘했다, 성 금요일에는 수난곡을 써내야 했으며 때때로 결혼식장과 장례식을 위한 모테트나 도시의 축제를 위한 음악도 작곡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업적과 음악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잊혀갔다.

1802년, 독일의 어느 음악사학자가 쓴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이라는 연구서가 발표되자 전 유럽에 바흐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악보를 발굴하고 수집하는 후배 작곡가들이 생겨나면서 그가 일했던 성 토마스 교회에도 그의 곡들이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흐가 마지막까지 음악 활동했던 곳인 라이프치히에는 그의 무덤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성 요한 교회의 입구 주변, 남쪽 벽에서 대략 여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바흐가 묻혀있다는 것이다. 마치 전설 같은 이야기였지만, 1894년경 성 요한 교회를 재건축하게 되자 전문가들이 모여 그의 진짜 무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해부학자와 조각가도 있었다.

무덤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1750년에 오직 12명 만이 오크나무 관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교회 입구 주변, 남쪽 벽에서는 실제로 3개의 관이 발견되었다. 2개는 소나무 관이었고, 1개가 오크나무 관이었다. 오크나무 관 안에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남성의 유골이 들어있었다. 두개골을 덮는 안면 마스크를 제작해보니 당시 알려져 있던 바흐의 초상화에 그려진 얼굴과 상당히 일치했다. 해부학자인 빌헬름 히스는 모든 증거를 모아 보고서를 발간했고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과 함께 그 유골이 실제 바흐라고 결론 내렸다. 바흐의 관은 성 요한 교회의 제단 아래에 있는 무덤으로 이장했다. 그러다 전쟁으로 교회가 파괴되는 바람에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지금은 그가 마지막까지 출근했던 성 토마스 교회 재단 위에서 무덤을 볼 수 있다.

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두고 “지루한 작품은 있을망정 수준 낮은 작품은 없다.”라고 칭송하며 그를 음악 역사상 가장 현실적이고 냉철한 작곡가라 일컫는다. 그 평가는 그가 남긴 음악과 업적 덕분이겠지만,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이 아니었다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그의 음악들을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진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한 일이다.

황은혜 기억과 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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