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에 있는 중국 간첩이 5000명을 넘는다.”
지난달 대만 전 군사정보국장 류더량은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포섭 대상 중 군인에게는 ‘미인계’가 효과적이었다. 매력적인 여성의 접근은 남성의 심리적 방어벽을 무너뜨렸다. 내밀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정보전, ‘섹스피오나지(sexpionage)’는 시대를 초월한 강력한 전략이다. 유혹의 주체가 반드시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은 정보의 세계에선 무너졌다.
여성에게 정보 얻는 ‘로미오’ 공작
동성애로 공략한 ‘까마귀’ 작전도
우리나라선 미인계 사례 드물어
그래도 정보요원은 늘 사주경계
1960부터 1990년까지 80여 명의 ‘로미오(미남계를 쓰는 공작원)’가 서독에 침투했다. 헬무트 콜 수상 비서, 바이체크 대통령실 행정관, 미국 대사관 통역사, 연방정보국(BND) 부국장, 유럽경제공동체(EEC) 행정 보좌관, 외무성 공무원 등 40명 이상의 ‘줄리엣(미남계 공작의 타깃 여성)’이 포섭됐다. 줄리엣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는 ‘줄리엣 한 명이 남자 외교관 10명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학창 시절 짝사랑한 선생님까지 연구
슈타지의 타깃은 서독의 기업·정부·의회·군대·정보기관에서 비밀정보에 접근 가능한 여성이었다. 남자 친구가 없는 여성이 이상적인 줄리엣이었다. 슈타지는 줄리엣의 상대역으로 25세에서 35세 청년 중 지적이며 신사적인 매너의 로미오를 선발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좋아하는 음식과 자주 가는 장소, 학창 시절 짝사랑한 선생님까지 연구했다. 버스 정류장과 식당, 영화관, 책방, 파티 모임에서 우연을 가장해 줄리엣에게 접근했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여성들이 로미오 공작에 걸려든 것이다.

‘로미오의 왕’이라 불리는 슈타지의 수장 볼프는 자서전 『얼굴 없는 남자』(사진)에서 로미오 공작의 단계별 기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성에게 먼저 접근하지 말고 여성이 먼저 당신을 찾도록 만들어라. 파티 참석자들에게 술과 음료를 사고 스스럼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라. 그 여성은 어느새 당신 곁에 와 있을 것이다. 첫 만남 후 관계가 깊어지면 프러포즈를 하고 당신의 신분을 스파이라고 당당히 털어놓아라. 단, 캐나다나 덴마크 같은 우방국의 스파이로 신분을 위장하라. 마지막 단계로 당신과 헤어지기 싫은데 실적이 부진해서 본국으로 소환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척하라. 이제 당신은 그 여성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1954년 1월 소련 주재 캐나다 대사로 부임한 왓킨스는 박학다식하고 세련되며 사교적 인물이었다. 러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여행을 좋아했다. 부임 첫해 겨울 왓킨스는 소련 남부 지역에서 ‘카말’이라는 청년을 우연히 만났다. 왓킨스는 카말을 ‘소련 체제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청년’으로 본부에 보고했다. 이듬해 4월에는 소련 외무부 소속으로 역사학자이며 컨설턴트인 ‘알로이샤’를 알게 됐다. 왓킨스는 알로이샤를 ‘소련 정부 내 최고의 정보 협력자’로 보고했고, 인간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소련 역사 아카데미’ 교수로 자신을 소개한 ‘닛킨’이라는 인물과도 친구가 됐다. 외견상 어느 하나 보안 규정을 위배한 것도 없었고, 본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도 없었다.
제 각각 만난 그들 모두 공작조

1956년 4월 귀환을 준비 중인 왓킨스에게 알로이샤로부터 연락이 왔다. 알로이샤는 “KGB의 비열한 공작”이라며 왓킨스와 카말의 동성애 장면이 찍힌 사진을 건넸다. 당시 캐나다에서는 동성애가 범죄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알로이샤는 왓킨스가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왓킨스는 자신의 운명이 이제 소련의 선의에 달려 있음을 직감했다.
8년 뒤 한 KGB 요원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1950년대 중반 KGB가 소련 주재 캐나다 대사를 협박했던 사실이 제보됐다. 알로이샤는 KGB 고위 간부였고, 닛킨은 정예 요원, 카말은 남성 섹스피오나지 요원인 ‘까마귀(Raven)’로 밝혀졌다. 무관한 인물들로 여겨졌던 카말, 알로이샤, 닛킨은 왓킨스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공작조의 일원이었다.

캐나다 경찰은 동성애가 소련의 협박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고, 1967년 7월 24일자 보고서에서 KGB의 동성애자 포섭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단계, 우연을 가장한 잦은 만남으로 타깃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아라. 2단계, 친분이 쌓이면 비밀 촬영이 준비된 장소로 타깃을 유인하라. 동성애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는 호텔, 아파트, 별장, 터키식 목욕탕이 좋다. 3단계, 동성애 사진을 제시하며 타깃을 협박하라. 협박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타깃에게 동성애 사진을 보여주며 직장 상사, 친구, 가족에게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라. 사진 촬영에 실패한 경우 해당 사진이 보관되어 있으며 타깃의 상사에게 보여줄 것처럼 하라. 타깃에게 동성애를 자백하거나 인정서에 서명하도록 압박한 후 서명을 하면 고발하겠다고 협박한다. 동성애 파트너 또는 제3의 인물에게 타깃을 협박하도록 사주한 후 경찰로 가장한 요원이 협박범을 잡는 척하거나 친구로 가장한 요원이 타깃에게 접근해 동성애 소문을 잠재우거나 증거를 없애주겠다고 한 후 ‘우정’의 대가를 요구한다.”
“그는 나를 사랑했을 거야”
로미오의 사랑을 끝까지 믿었던 어느 줄리엣은 “그가 날 이용했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믿기 어려워요”라는 말을 남겼다. KGB는 캐나다 외무부도 파악하지 못한 왓킨스의 성적 취향까지 파헤쳤다. 이 정도로 정교한 설계면 누구도 함정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정보전이 펼쳐지는 곳이 한반도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로미오나 까마귀가 고급 정보를 빼간 사례는 아직 듣지 못했다. 전통적인 미인계로 대상을 넓혀도 해방 직후 여간첩 김수임 사건과 군 장교와 만난 탈북자 간첩 원정화 사건 정도다.

북한이 로미오나 까마귀처럼 섹스피오나지를 감성적으로, 체계적으로 양성할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니 우리로선 다행스럽다. 그래도 정보 요원들은 미인계 공작이 접근해오는 건 아닌지 늘 사주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북한이 남한 유력 인사를 그런 방식으로 공략할 가능성을 항상 주시한다. 한 번 걸리면 벗어나기 힘든 덫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한 류더량 전 정보국장은 2018년 6월 정년퇴직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로미오와 까마귀는 지금도 어디선가 새로운 얼굴로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