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전 제자가 건넨 편지 / 박남기

2025-12-04

2박 3일간의 타 지역 연속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날에도 인근 지역에서 오전과 오후 강연을 해야 했다. ‘내가 왜 이리 살아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런데 강연장에서 모든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깜짝 선물을 받았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분이 다가오더니 살며시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내가 교수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수업을 들었던 제자라고 소개하고는 수줍게 편지를 건네고 다른 연수생들 사이로 사라졌다.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고 할 걸 미처 그리하지 못했다. 제자의 긴 편지를 읽다 보니 시간을 훌쩍 넘어 30여 년 전으로 타임슬립을 한 기분이다. 일부 내용을 발췌·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수님, 이번 연수 계획서에서 교수님 성함을 보고 깜짝 놀람과 동시에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는 30여 년 전 광주교대 2학년때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감명받았던 제자입니다. 교수님이 광주교대 교수로 임용되던 첫해 학생으로 만나 뵙고, 퇴직을 하신 첫해에 다시 학생으로 만나뵙습니다…. 다른 수업과 달리 매시간 몰입해서 눈을 빛내며 들었던 유일한 과목이 교수님 강의였습니다. 비록 한 학기 동안이었지만 교육에 대해, 교사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번쩍 뜬 새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강의할 때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교수님의 눈과 열정적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편지 안에 동봉한 또 다른 글을 보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짐작이 갔다. 대학원 공부도 했고, 이제는 장학사를 거쳐 교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교수님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편지 글귀가 와 닿았다. 매 학기 종강날이면 제자들에게 주었던 ‘제자를 보내며’라는 편지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들어 있다.

우리 조상의 생물학적 정보가 유전자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전달되었듯이 가르침의 길에 선 우리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지혜는 ‘밈(meme)’을 통해 나의 스승에게서 나를 거쳐 여러분에게로, 그리고 다시 여러분의 제자를 통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문화유전자 밈을 전수받은 제자가 나보다 더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하여 이렇게도 자랑스럽게 내 앞에 나타났다.

살다보면 세상이 얼마나 좁은가를 알 수 있다. 병원에서 만난 의사도, 고등학교 동창도, 우연히 소개받은 사람들도 내 이름과 근무처를 알게 되면 곧바로 자기가 아는 교대 출신 지인들에게서 들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듣다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제자도 있으리라. 그들을 향한 미안한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늘 열심히 지냈다. 결국 부족함을 줄이지 못한 채 퇴직하게 됐다.

얼마 전 있었던 교수 대상 강연에서 해당 대학 교무처장이 이런 말을 해왔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굳이 AI와 같은 새로운 것들 배우지 않고 좀 버티다가 퇴직하려고 했단다. 그런데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내가 ‘AI 시대 최고의 교수법’ 관련 책을 내고 강연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바꿔먹게 됐다고 했다.

또 다른 30여 년 후에 마주치게 될 어떤 분이 당시 나와의 만남 덕에 세상을, 그리고 교육을 새롭게 보며 열심히 살아오게 되었노라는 전언을 듣는 것이 물리적으로는 거의 어려울 것이다. 내가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곳에선가는 나와의 만남을 기억하며 훌륭한 스승으로 자신을 가꿔가고 있을 분이 있으리라는 희망이 다시 생긴다. 오늘 제자가 건넨 하얀 편지 봉투는 퇴임 후 삶을 이끌어갈 새로운 열정의 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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