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퀘벡 만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4-09-27

캐나다 땅에 프랑스와 영국이 눈독을 들인 것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기적으로는 프랑스가 좀 더 빨랐다. 프랑스인들은 지금의 퀘벡주(州) 일대에 정착촌을 세우고 ‘새로운 프랑스’를 선언했다. 이미 미국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인들은 뉴펀들랜드 섬을 근거지 삼아 영역을 넓혀 갔다. 캐나다가 아무리 광활해도 이질적인 두 세력의 공존은 어려운 일이었다. 1689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캐나다 전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됐다. 이는 세계 패권을 둘러싼 영국·프랑스 간 대결의 일부이기도 했다.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이 끝난 1763년 캐나다 지배권은 결국 영국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프랑스계 주민들이 캐나다에서 쫓겨나거나 프랑스로 탈출한 것은 아니다. 영국 의회는 프랑스계 주민이 많이 사는 퀘벡주에 특별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퀘벡 사람들은 예전처럼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됐다. 영미법과 전혀 다른 프랑스 특유의 대륙법 체계에 따른 민법 또한 살아남았다. 퀘벡이 캐나다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국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한 회유책이었다.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이 영국 정부의 억압적 통치에 반기를 들고 결국 독립을 선언한 점과 비교해보면 퀘벡은 상대적으로 ‘특혜’를 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를 둘 다 공용어로 인정한다. 퀘벡의 경우 프랑스어를 쓰는 이가 영어권 주민보다 훨씬 더 많다. 영어를 전혀 몰라도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퀘벡 사람들 사이엔 영국 그리고 영국계 시민들이 주류인 캐나다에 대한 반감이 여전하다. ‘퀘벡이 캐나다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국이 돼야 하는가’를 묻는 주민투표가 1980년과 1995년 두 차례 실시됐을 정도다. 비록 반대 의견이 더 많아 부결되긴 했으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2022년 12월 퀘벡 주의회에선 새로 취임한 프랑스계 의원들이 캐나다 국가원수인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가 의사당 본회의장 입장을 제지당하는 촌극도 빚어졌다.

1967년 7월 캐나다를 방문한 샤를 드골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자유 퀘벡 만세”를 외쳤다. ‘퀘벡이 캐나다에서 독립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한 언행이었다. 당장 캐나다 정부에선 ‘노골적인 내정간섭’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레스터 피어슨 당시 캐나다 총리는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라며 격분했고, 드골은 수도 오타와 방문 일정을 취소한 채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57년 넘게 지난 2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몬트리올을 찾았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마크롱은 프랑스 언어와 문화가 캐나다에서 앞으로도 계속 보존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국 언어와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 참 대단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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