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현실서 아이들 지켜야…'우크라 귀국열차' 안 탈 수도" [우크라전 3년-난민 인터뷰]

2025-02-23

우크라이나인 음악가 나탈리아 볼로슈코(47)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다. 전쟁으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협조로 지난 18일 화상 인터뷰한 굴곡진 인생 역정을 그의 시선으로 되짚어봤다.

하르키우의 얼어붙은 공기를 폭음이 때렸다. 의식이 새벽 잠에서 우악스럽게 꺼내지면서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TV 송신탑이 보였다.

다시, 전쟁이었다.

14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9층의 임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왔다.

내가 운영하던 음악학원에 지하실이 있었다. 수강생들의 학부모들에게 연락했다. 갈 곳이 없으면 내 학원으로 대피하자고 했다. 2022년 2월 24일 그날 밤은 학원 지하실 바닥에서 뜬 눈으로 보냈다.

돈바스 출신인 나는 8년 전 전쟁을 이미 겪었다. 돈바스에선 친러시아 반군과 우크라이나군이 서로 죽이고, 죽었다. 하르키우로 몸을 피했다. 피아니스트인 나는 하르키우에 음악학원을 차리고 안착했다. 그러나 또 전쟁이 시작됐다.

지하실에 모여든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눈에는 공포와 눈물이 어른거렸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기도했다.

날이 밝자 아들을 데리고 폴란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천운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차와 경적 소리가 역으로 향하는 도로를 메웠다. “러시아가 공격했다”는 절규와 울부짖음이 뒤섞여 있었다.

피란민으로 가득한 기차는 때때로 멈췄다.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물과 먹을 것, 빛이 없는 검은 밤길을 기차는 스무 시간을 달렸다. 원래는 두 시간 거리다. 전쟁 발발 사흘 후인 27일 오전 12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땅을 밟았다. 그리고 이틀 후, 러시아의 미사일 폭격을 받은 하르키우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폴란드인들이 우리를 반겨줄까. 과거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다. 독립한 우크라이나에는 한때 친러시아 정부가 들어서서 폴란드와 맞섰다. 난 폴란드어도 몰랐다. 일주일 내내 침대맡에서 울기만 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우리 모자에게 마음을 열었다. 잠잘 곳과 구호품을 제공했다. 다른 나라와 국제기구도 우리를 도왔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다.

나는 함께 터전에서 쫓겨난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어린이교육센터’와 ‘볼로슈카 뮤직’ 두 곳을 설립했다. 뮤지컬과 오페라, 피아노 소리에 전쟁에 상처 입은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웃음을 되찾기를 바랐다.

지금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을 끝내려 한다. 우리를 러시아의 일부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크라이나인이고, 러시아인이 아니다. 우리는 작지만, 독립된 나라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러시아가 벌인 전쟁으로 조국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은 고통받고 있다. 동시에 나는 음악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전쟁을 이긴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도 영원할 것이다.

우리 우크라이나인의 영혼 역시 깊다.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폴란드에 계속 남아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것 같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이 미친 현실에서 아이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나탈리아 볼로슈코

러시아 접경지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 태어났다. 2014년 ‘돈바스 내전’으로 북동부의 하르키우로 이주했다. 음대 졸업 후 우크라이나 문화부에서 8년간 일했고, 이후 음악학원을 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로 대피해 난민으로 살고 있다. 2023년에 우크라이나 어린이교육센터(재단), 볼로슈카 뮤직(학교)을 세웠다.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의 정신적 치유를 위한 음악 교육 프로그램 등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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