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멘터리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남다른 브랜드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그 설레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코너 속의 코너, 〈스몰 브랜드 스토리〉에서는 작지만 강력한 이야기를 가진 브랜드를 모아 봅니다. 골목에서 자랐지만, 곧 광장으로 나올 준비가 된 작은 브랜드의 유일무이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는 차를 바꾸고, 2만 달러가 되면 집을 바꾸고, 3만 달러가 되면 가구를 바꾼다고 해요. 우선 급한 의식주를 해결하고 난 뒤, 비로소 생활 방식이나 취향을 따질 여유가 생긴다는 의미겠죠.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긴 시기는 지난 2014년(2024년 한국은행 기준).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가 한국 진출을 선언한 해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 때, 또 하나의 리빙 브랜드가 탄생합니다. 그것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리빙 브랜드가요.
오늘 비크닉은 내실 있게 10년을 꾸려온 한국 리빙 브랜드, '레어로우'를 조명해 보려 해요. 철제 가구가 낯설었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K-리빙’의 가능성을 보여준 브랜드죠. 지난 11일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레어로우 쇼룸에서 양윤선(39) 대표를 만났어요.
날 것의 매력에 빠지다
빈틈없이 짜여 벽에 고정된 철 소재의 시스템 선반-. 레어로우는 철제를 활용해 선반부터 테이블·수납장·의자 등 다양한 가정용 가구를 만드는 브랜드예요. 브랜드명 그대로 철이라는 날 것(raw)이 주는 드문(rare) 감성을 표현하는 브랜드죠.
레어로우가 탄생했던 2014년 당시만 해도 가정용 철제 가구는 낯설었어요. 벽을 하얗게 칠하고, 나무 가구를 채우는 이른바 ‘북유럽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죠. 철제 가구는 주로 사무실이나 학교 같은 공용 장소에서 쓰는 가구라는 인식이 높았고요.
이 편견을 뒤집은 양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철제 가구와 친숙했어요. 서울 을지로에서 철물점을 운영했던 할아버지에 이어 경기도에서 철제 가구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 덕분이죠. 어린 시절 거실에 놓인 TV 장은 물론, 침대 프레임까지도 철제였다는 양 대표가 철제 가구의 매력에 빠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죠.
2013년, 해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온 양 대표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가구 공장 ‘심플라인’에 합류하게 돼요. 회사는 주로 의류 브랜드 매장에서 사용하는 행거·선반을 기업 간 거래(B2B)로 납품하던 업체였는데, 첫 현장이었던 '에잇세컨즈' 매장에서 그는 '가정용 철제 가구 브랜드'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죠. 각 맞춰 도열한 철제 가구에서 신선함과 아름다움을 느낀 양 대표는 '왜 꼭 이런 선반이 매장용이나 사무실용이어야만 할까'라는 의문과 함께 철제 가정용 가구에 대한 구상을 싹틔웁니다.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철제 가구 특유의 젊은 감각은 레어로우의 초기 성장을 이끌었어요. 주로 해외에서나 봤던 철제 시스템 가구를, 품질 좋은 국내산 철강으로 튼튼하게 만들어 합리적인 가격으로 선보였으니까요. 다행히 철제 소재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이케아가 인기를 끌고, 유리와 철·플라스틱 같은 산업용 소재를 인테리어에 활용하는 ‘미드 센추리 모던(mid-century modern)’ ‘인더스트리얼(industrial)’ 스타일이 소개되면서 철제 가구에 대한 인식도 점차 넓어졌죠.
1세대 억대 쇼핑몰 팔고, 유학길 오르다
하지만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은 제조와는 또 다른 얘기죠. 모기업 심플라인의 생산 노하우를 바탕으로 좋은 제품은 만들었지만, 레어로우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이 시점에서 양 대표의 다소 독특한 이력이 빛을 발합니다.
어린 시절 첼로를 배웠던 양 대표는 스무살 무렵 목표를 잃고 방황했다고 해요. 이때 부모님이 여행이나 가라며 선뜻 내어준 500만원으로 패션 사업을 시작했죠. ‘싸이월드’가 흥했던 시절, 무작정 동대문으로 가 옷을 떼어다 ‘미니 홈피’에서 팔기 시작했죠. 나중엔 자사 온라인 몰을 만들 정도로 안정적으로 운영됐고, 약 2년 후 성공적으로 ‘엑시트(Exit·투자 회수)’까지 하죠. 자본금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벌고 나서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양 대표는 유학길에 올라 뒤늦게 미술과 공간 디자인 공부를 시작해요.
패션 쇼핑몰로 ‘감각적 장사’에 소질이 있다는 걸 한번 증명했기 때문일까요. 이십 대 후반 레어로우 론칭 당시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리빙이든 패션이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제안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니까요.
실제로 레어로우는 특유의 감각을 바탕으로 성장해 온 브랜드예요. 특히 SNS를 통해 세련된 비주얼을 뽐내며 ‘컬러 맛집’으로 등극하죠. 액상 도료가 아니라 분체 도장 기법으로 색을 입히는 철제 가구는 발색이 선명하고 강도도 좋죠. 목제 가구 브랜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색상은 레어로우의 젊은 이미지와 맞물려 눈길을 끌었어요.
선반으로 만든 책 감옥, ‘갓생’ MZ 몰렸다
속은 투박한 철로 단단한 중심을 받치고 있지만, 겉은 부드러운 색으로 단장한 레어로우는 브랜딩에서도 비슷한 행보를 보여요. 양보할 수 없는 품질은 단단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시의적절하면서도 재미있는 콘텐트를 더해 브랜드를 알리는 거죠.
지난 봄 서울 성수동 ‘레어로우 하우스’에서 열린 팝업 전시 ‘책 감옥’이 대표적이에요. 배달의민족 마케터 출신의 스테이폴리오 장인성 대표를 브랜드의 ‘뮤즈’로 삼아 특별한 전시를 선보였죠. 레어로우 가구로 몰입을 위한 사무실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를 ‘책 감옥’으로 표현했어요. 책을 꽂은 레어로우 선반으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실제로 1시간 동안 갇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체험형 공간이죠. ‘독파민(독서+도파민)’을 원하고 ‘갓생’을 추구하는 요즘 MZ들의 호응을 끌어냈어요.
약 2년간 운영됐던 레어로우 하우스에서는 이 밖에도 뮤즈가 된 고양이 수의사가 집사들을 위한 공간을 소개하고, 뮤지션 선우정아와가 ‘더 필요한 게 없는 세계’라는 주제로 아티스트를 위한 아늑한 공간을 선보였죠. 양 대표는 “레어로우를 대표할 수 있는 뮤즈가 주택을 개조한 공간에 자기만의 색을 담은 공간을 꾸민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기획이라고 말했어요. 덕분에 레어로우는 젊은 고객들 사이 언제가 내 공간을 꾸린다면 기꺼이 들이고 싶은 브랜드가 됐죠.
브랜드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레어로우의 브랜딩 방식은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메종&오브제’에서도 드러났어요. 베스트셀러 ‘시스템000’을 가지고 파리로 향한 양 대표는 레어로우의 색을 ‘형광 녹색’으로 표현했어요. 형광 녹색으로 파티션을 만들고, 그 안에 다양한 커스텀 제작이 가능한 시스템 장을 설치했죠. 워낙 선명한 형광색 덕분에 전시장 내 ‘레어로우밖에 안 보였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고 해요. 양 대표는 “수많은 바이어가 부스에 들러 이렇게 제조 기술이 있으면서도 브랜딩이 잘 된 브랜드는 처음 본다는 칭찬도 들었다”면서 “한국 리빙 산업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에 뿌듯했던 시간”이라고 소회를 밝혔어요.
K-브랜드, 리빙도 간다
지난 10월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레어로우 10주년 전시는 그동안의 성장사를 엿보는 뜻깊은 행사였어요. 저명한 리빙 디자인 스튜디오 10곳과 함께 협업한 제품을 소개했는데, 기존 레어로우 제품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자는 야심 찬 기획 아래 펼쳐진 전시였죠.
협업을 진행한 스튜디오의 면면은 화려했어요. 스위스를 대표하는 리빙 디자인 스튜디오 ‘빅게임’과 스웨덴의 ‘폼 어스위드 러브’, 일본의 리빙 브랜드 ‘모헤임’ 등이 함께했죠. 레어로우의 원천과도 같은 금속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으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고, 새로운 기술과 소재로 모험적 디자인을 선보인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10개의 독창적 제품들이 탄생했죠.
기존 레어로우와는 또다른 색깔을 내뿜는 협업 가구들은 레어로우가 현재 한국 리빙 업계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의미도 있었어요. 단순히 철제 가구를 잘 만드는 브랜드에서, 리빙 브랜드 시장을 선도하는 브랜드로서의 자리매김이라는 점에서요.
지난해 해외 사이트를 열고 직접 해외 배송까지 도전한 레어로우는 앞으로의 목표를 해외 진출로 삼고 있어요. “우선 부딪혀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양 대표의 다짐은 어쩌면 K-패션, K-뷰티에 이어 K-리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