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저널]원영수 국제포럼= 지난 5월 13일 우루과이 전대통령 호세 “페페” 무히카가 89세의 나이로 몬테비데오, 린콘 델세로의 농장에서 식도암과의 사투 끝에 사망했다. 평생의 동지 루시아 토폴란스키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
2010~15년 우루과이 대통령을 역임한 호세 무히카는 퇴임 후 선거 정치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자신의 속한 민중참여운동(MPP)의 풀뿌리 사업에는 계속 참여했다.
1935년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난 무히카는 젊은 시절 대부분을 농촌에서 보냈다. 1960년대 농업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좌파 운동에 뛰어들었다.
1962년 무히카는 국민당을 떠나 맑스주의 경향의 도시 게릴라 조직인 투파마로스에 가입했다. 쿠바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투파마로스는 도시 무장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무히카는 루시아 토폴란스키를 만나 결혼했다. 루시아는 무히카의 평생 동지로 지냈고, 국회의원과 부통령직을 역임했다.
호세 무히카는 1960~70년대 좌파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독재에 맞선 도시 무장투쟁을 주도한 민족해방운동-투파마로스 게릴라 운동의 지도부에 속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번 체포됐고, 특히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3년 동안 독방에 갇혀 고문과 구타에 시달렸다.
1985년 석방된 뒤 호세 무히카는 합법 정치에 뛰어들어 동료들과 함께 민중참여운동(MPP)을 건설했다. 이 조직은 1970년대 좌파 연합으로 건설된 범좌파전선(FA: 폭넓은 전선)에 하나의 정파로 참가했다.
호세 무히카는 1995년 하원의원, 1999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우루과이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가 집권한 2005년에는 타바레 바스케스 정부에서 농업부 장관을 지냈다. 마침내 2010년 대통령직에 올랐다.
2010~15년 집권 시기에 무히카는 사회적 포용과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2013년에는 동성결혼법을 통과시켰고 세계 최초로 마리화나를 합법화시켰다. 또한 극빈층에 대한 주거지원과 취약 가정에 대한 재정지원 등 사회 소외층의 복지 향상에 힘썼다. 그러나 그가 희망했던 교육개혁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외교적 측면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단결과 연대를 추구했고,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 남아메리카 국가연합(UNASUR)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무히카는 2015~18년 상원의원에 다시 당선돼 정치활동을 벌였지만, 2020년 코로나와 나이를 이유로 상원의원을 내려놓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2024년 4월 식도암 말기 상황임을 알리고 모든 공적 활동에서 은퇴했다. 그럼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풀뿌리 활동을 이어갔고, 2024년 대선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5년 1월 무히카는 말기암 상황 아래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고 밝혔고 동지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보냈다.
대통령 재임 동안 무히카는 대통령 관저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농장에서 살았고, 고물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다녔다. 1만2000달러 가량의 대통령 급여 가운데 90퍼센트를 사회단체에 기부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존엄 있는 삶이라고 본다. 나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치인 다수의 대중처럼 산다면 존경받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우루과이 범좌파전선은 2024년 선거에서 승리해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2025년 3월 호세 무히카와 같은 민중참여운동 소속 야만두 오르시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오르시의 좌파 정부는 호세 무히카의 개혁을 이어갈 것이다. 호세 무히카는 겸손한 삶을 마감하면서 우루과이 좌파만이 아니라 전 세계 좌파의 귀감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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