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와 나, 그리고 호찌민

2024-09-25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놀라운 재능을 지닌 사람이 고난을 무릅쓰고 시대정신을 구현하려고 했다면 우리는 존경해야 마땅하리라.

내 정신적인 성장기였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시대의 지성인, 이를테면 문익환과 이영희, 백기완, 신영복, 조영래 같은 분들이 계셨다. 이 분들은 관념이 아닌 구체적 실천으로 국가폭력에 꾸준히 저항해 캄캄한 시대의 밝은 등불이 된 분들이다.

시인 김남주도 잔인했던 시기에 고난의 발자취를 깊게 남겨 우리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분이었다.

“그러니 가자 우리 이 길을

길은 가야 하고 언젠가는 역사와 더불어 이르러야 할 길

아니 가고 우리 어쩌랴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어깨동무하고 가자.”

- 『김남주 평전』 강대석. 2004. 한얼미디어. 131쪽

나는 시를 모른다. 위의 시처럼 시대의 절실함을 쉬운 말로, 시대의 의무를 그 쉬운 말에 담아 노래한 해남 출신 김남주의 시는 목포 출신 김지하의 시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라는 걸 알 정도일 뿐이다.

내가 김남주 시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호찌민을 통해서였다.

혁명가 호찌민이 평생 몸에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이 아닌 타자기였다. 타자기로 쓴 글의 대부분은 호소문과 선전물, 또는 기행문, 신문 기고문 따위의 글이었다. 이런 글로 인민들의 민족혼을 일깨우며 식민주의‧제국주의와 투쟁하는 데 용기를 잃지 말자고 호소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가진 무기보다 강하다”란 구호로 전 인민을 결집시키고 용기를 북돋았다. 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세계 구석구석을 한 숨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기에 여유롭고 문학적인 가치가 있는 글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 호찌민은 의외로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 명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뛰어난 정치적 인물이 문학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에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이 아쉽게도 없다. 베트남에는 명나라와의 항쟁에서 승리를 이끈 응우옌 짜이(Nguyễn Trãi, 阮廌: 1380 ~ 1442)라는 분이 더 있다.

호찌민은 프랑스 당국의 1급 수배자여서 항상 체포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해 수 차례 아슬아슬하게 체포를 피했다. 그러다가 1931년 홍콩에서 영국경찰에 체포되었다. 프랑스는 영국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영국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홍콩을 탈출했다.

1942년 8월에는 베트남에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가다가 중국국민당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13개월 동안 13개 현 18개 토굴감옥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목에 바퀴를 매달거나 쇠사슬에 묶이기도 했다. 항상 굶주렸고 또 탈진했다.

호찌민은 수감생활 중에서도 예의바르고 명상을 즐기는 노인으로 처신했다. 이내 간수들과 친해졌다. 덕분에 담배용 종이를 구할 수 있었다. 짓이긴 쌀밥을 접착제로 사용해 긴 종이를 만들었다. 잉크는 태운 쌀가루를 시금치죽에 넣어 만들었다. 젓가락을 붓으로 사용했다. 족쇄를 찬 손으로 민족의 간절한 소원을 애틋하게 적었다.

감옥에서 여러 달에 걸쳐 쓴 시가 바로 「옥중일기」다. 이 「옥중일기」로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문화 명인’이란 칭호를 받았다. 134편의 한시는 일기라기보다는 감상문이다.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문으로 한시를 지었다. 아마 중국인 간수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호찌민은 대단한 언어 실력자였다. 머무는 곳마다 언어를 익혀 7개(?)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유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배운 한문실력도 대단했다.

「옥중일기」의 간결한 표현에는 소박미가 넘치고 심오한 내용에는 감화력이 충만했다. 많은 평론가들은 문장실력이 대단했던 붉은 대륙을 석권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한시보다도 형식과 내용이 더 알차다고 했다.

「옥중일기」를 보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선 호찌민의 초인간적인 면모가 역력하다. 극한 상황도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강한 의지로 돌파했다. 인민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위대한 지도자 정신, 처참한 옥중에서 꿈에도 잊지 않고 압박받는 동포들의 참상을 마음 아파하는 인간애와 불타는 애국심에 숙연한 마음이 절로 든다.

다음은 「옥중일기」의 첫머리(卷頭) 시이다.

“이 몸은 비록

옥중에 갇혀 있지만,

정신은 결코

감옥에 구속되지 않네.

큰일을 하려면

정신을 더욱 크게 가져야지.

身體在獄中

情神在獄外

慾成大事業

情神更要大”

- 김남주 번역

이 시는 프랑스 식민시대와 미국하고 전쟁하던 항미전쟁(베트남전쟁) 시기에 베트남 감옥에 갇힌 애국자 죄수들이 벽에 어김없이 새겨놓은 시다.

나는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시대와 항미전쟁 시기의 감옥 모형물을 봤고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시대의 서대문 형무소도 봤다. 이런 비유는 어떨지 몰라도 서대문 감옥은 베트남의 감옥에 비하면 7성급 호텔 같았다. 그만큼 무지막지하게 열악한 베트남 감옥에서 애국자들은 호찌민의 권두시를 벽에 새겨놓고 인내했다.

호찌민의 「옥중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몇 분이 번역해 단행본 책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김남주의 번역책이 있다는 걸 알고 구했다. 나는 한문에 실력이라 할 건덕지가 없다. 어느 책의 번역이 더 우수한가를 판별할 능력이 없다. 『왜 호찌민인가』를 쓸 때 왠지 김남주의 번역을 인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김남주의 『은박지에 새긴 사랑』은 호찌민과 네루다, 푸슈킨, 르이네프네 등 4인의 시를 번역한 작품이다. 김남주는 여러 책에서 위 네 사람 외에 하이네의 「아타 트롤」을 포함해 세계적 시인 십여 명의 시 수백 편을 번역했다. 영문과 출신답게 어학에 뛰어났으며 일어실력도 대단했다고 한다.

간디의 정치적 제자이자 인도 초대 수상을 역임한 네루는 감옥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 약 3년간 어린 딸 네루에게 보낸 편지글은 세계사 이야기다. 이른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한 『세계사 편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3권으로 번역 책이 나왔다. 각권이 약 600쪽에 달한다. 3권이면 1,800여 쪽, 어마어마한 양이다.

책의 내용도 딸에게 보내는 감상적인 편지글이 아니다. 수준 높은 역사의 핵심을 담아 세계사 통사에 관한 여러 전문 역사가들의 책들보다 내용수준이 뛰어났다. 『세계사 편력』은 세계사 방면 책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감옥에서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네루의 해박한 지식에 먼저 감탄했고 방대한 책을 쓸 수 있는 영국의 감옥 또한 그렇게 부러웠다. 이에 비해 유신시대 우리 감옥은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도 손에 쥘 수 없게 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유산으로 최근까지 우리 사상범들은 감옥에서 글을 쓰지 못했다. 사상의 통제, 이 얼마나 야만적인가?

그런대도 일제 강점을 당연하고 그 지배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보수라 지칭하고 그런 자들이 집권보수의 핵심세력이니, 우리 보수의 지적수준이 얼마나 천박하고 비루한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예다. 김남주는 간수 몰래 우유곽 안쪽 은박지에 날카롭게 갈은 칫솔대로 꾹꾹 눌러 글을 썼다고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2005년 무렵 치과 선배 송학선 형님의 문화답사팀 일행이 직지사에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직지사 주지는 우리나라 탁본의 대가이자 불교문화 전반에 해박한 학식을 지닌 흥선 스님이셨다. 더욱이 일행 가운데 김남주 시인의 부인인 박광숙 선생도 있었다. 두 말 없이 직지사로 달음질쳤다.

답사 일행 10여 명은 흥선 스님의 배려로 직지사 영빈관에 일박할 수 있었다. 나는 박광숙 선생에게 호찌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고 요즈음 호찌민의 「옥중일기」에 관심이 많다고 하니 박 선생이 매우 반기셨다.

깊은 밤 호젓한 절간 마루에 걸터앉아 박 선생은 김남주 시인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호찌민의 ‘옥중시’를 일어판으로 번역하시며 무척 애정을 가지셨다고 했다. 시인은 출옥 후에 틈틈이 호찌민의 옥중시를 번역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남주 시인과 짧은 결혼생활의 사적인 이야기도 해주셨다. 숲속 절간의 밤은 별빛의 웃음이 보일 만큼 맑고, 별들의 속삭임이 들릴 만큼 고요해 박광숙 선생과의 이야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시인의 부인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자리는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꿈의 자리였다.

세계적 시인 6명의 시를 번역한 시집 『은박지에 새긴 사랑』의 본문은 320쪽이다. 그 중 호찌민 시와 해설은 150쪽이다. 책 내용의 거의 반이 호찌민의 시다.

호찌민은 20세기, 아니 그 너머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족해방전사였다. 시인이기 이전에 민족해방전사를 꿈꾼 김남주는 이런 호찌민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대 우리나라 모든 시인은 물론 지성인 가운데 김남주 시인만큼 호찌민에게 애착을 보인 이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김남주 시인은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은박지에 새긴 사랑』 김남주. 2001. 푸른숲’의 표지 글에서 인용)

“저는 외국어를 통하여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외국어 서적을 읽고 세계를 바르게 인식했습니다. …제가 시에서 제 나름대로의 길을 찾게 된 것은 순전히 이들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번역한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인 김남주는 재능은 물론 안목이 넓었다. 김남주의 시인으로써 품격은 곧 세계 일류 시문학을 사랑하고 깊이 이해한 안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말을 감각적으로 맛있고 기발하게 조리하는, 재능이 있는 시인은 많다. 김남주 당대의 시인 가운데서도 재능이 뛰어난 시인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넓은 안목과 긴 호흡으로 ‘시대정신’을 노래한 시인은 극히 드물었다.

김남주 시인은 아쉽게도 비슷한 또래의 조영래 변호사처럼 긴 호흡을 하지 못했다. 우리 역사의 복이 여기까지였단 말인가?

나는 어쩌다가 호찌민을 알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호찌민의 정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홀로 끙끙 거리며 호찌민을 찾았다. 만약 시인이 긴 호흡을 하셨다면 해남의 땅끝 마을 호젓한 절집을 찾아 시인과 호찌민에 대해 며칠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올해로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난지 30년이 되었다. 지금, 일본을 마치 정신적 조국으로 생각하는 천박한 정치권력자들이 정치판을 주무르고 있다. 나아가 쪼개진 조국을 당연시하며 전쟁 불사도 서슴지 않고 있다.

시인 김남주가 그토록 목 놓아 불렀던 그 ‘조국은 하나다’의 현재적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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