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대법원이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보다 더 첨예하고 난감한 질문 앞에 놓인 기관은 국립국어원처럼 보인다. 이미 언론을 통해 기사화된 것처럼,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아내 김건희 여사에게 제기된 의문에 대해 “(부인이) 남들한테 좀 욕 안 얻어먹고 원만하게 잘하기를 바라는 그런 일들을 국정농단이라 그런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좀 다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한 것에 대해 한 네티즌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온라인 가나다’ 코너에 정말 김건희 여사의 행동을 국정농단으로 칭할 수 없는 것인지 문의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에 질문은 진지하고 집요했다. 질문자는 표준대사전을 근거로 ‘국정’은 ‘나라의 정치’, ‘농단’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의미하는 만큼, 그 합성어인 ‘국정농단’으로 헌법상 어떤 지위도 가지지 않은 영부인이 선거와 국정에 개입한 행위를 명명할 수 있지 않은지 국립국어원의 공식 입장을 요청했다. 개인적으로는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마지막 경연 결과를 앞뒀을 때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기다렸다. 과연 어떤 답변이 달릴 수 있을까. 물론 현실에서 벌어지기 어려울 통쾌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어떤 답변으로도 해당 질문이 만든 긴장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기에 답변한 이후 혹은 답변을 유예하며 남을 여분의 긴장이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거나 튀어나갈 것인지 궁금했다. 실제로 11일에 달린 국립국어원 답변은 예상을 크게 비켜 가진 않았다. “온라인 가나다는 어문 규범, 사전 내용, 어법에 대하여 간단히 묻고 답하는 곳이므로 어떤 특정 행위가 문의하신 표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답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무난한 회피. 하지만 복잡한 현실의 맥락 앞에 놓일 때 말과 글은 화자의 주관적 의도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결국 이 답변은 김건희 여사의 ‘특정 행위’가 국정농단이 아니라는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이 변명했듯 ‘사전 내용’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의미론의 영역까지가 그들의 역할이라면, 바로 그 사전 내용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다던 대통령의 말이야말로 국립국어원조차 답하거나 보증할 수 없는 적극적이고 자의적인 언어 해석의 영역이다. 적극적이고 자의적이라 그의 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격렬한 해석적 투쟁을 동반한다. 윤 대통령의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건, 바로 그 해석 투쟁이 벌어져야 할 화용론적 세계에서 국정농단이 아닌 이유를 제시하며 한 판 붙는 대신, 국어사전이 해당 행위를 올바르게 지시하느냐는 의미론의 세계로 도피해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을 단순화하면(물론 이미 단순하지만) ①김건희가 한 행동은 A라는 의도에서 벌어졌다. ②A는 국정농단의 사전적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 ③A를 국정농단이라 하는 건 사전적 정의의 잘못된 적용이기에 틀렸다. 이 논리 진행이 대충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론 매우 대충 봐야 하지만) ①과 ② 사이에 중대한 누락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사전적 혹은 보편적 정의로서 국정농단의 범주란 어디까지인가. 이것이 정확히 국립국어원에 올라온 질문이 환기하는 것이다. 국정농단이 어떤 행위 B를 지시하는지 제시해야, ③의 단계에서 A와 B 사이의 유사성과 A라는 의도가 B라는 실천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판단하고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에 대한 논증을 부담하는 대신, 본인 스스로도 제시하지 못하는 사전적 정의의 권위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러니 국어사전도 국립국어원도 죄가 없다. 단지 무력할 뿐이다.
사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 묻지 않아도 국민 상당수는 이번 대통령 담화가 잘 정돈된 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특검도 국회감사도 아닌 국립국어원이 졸지에 대통령 발언의 참과 거짓에 대한 최종심급의 위치에 올랐던 이 짧은 사건은 굉장히 흥미롭다. 지상파를 포함해 수많은 방송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고, 하나의 발언이 마무리될 때마다 일간지의 인터넷 속보로 전해지는 대국민 행사로서의 대통령 담화는 그 자체로 다양한 맥락을 지닌 문화적 텍스트다.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는 이 거대한 쇼의 성공 유무를 가늠하는 건 정치 평론의 영역이겠지만, 미디어를 매개해 전달되는 담론과 이미지들을 비판적으로 재독해하는 건 미디어 및 문화 비평의 영역이기도 하다. 특히 국립국어원 에피소드는 정치적 승부수도 기만술도 아닌 언어 자체의 빈약함을 드러낸다. 스스로는 정치적 레토릭의 곡예를 부리는 대신 우직함과 솔직함으로 승부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일부 국민은(온라인 가나다 질문자 닉네임도 국민이다) 대통령이 레토릭은커녕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의 멀쩡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인 건지 학술적 기관을 통해 확인하는 중이다. 답변 각각으로는 산발적이고 중구난방이던 이번 담화가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재구성되는 건 이 지점이다. 기자회견 말미 윤 대통령은 외국인 외신 기자의 한국어 질문에 대해 “말귀를 잘 못 알아듣겠다”며 대통령실 관계자를 통해 영어로 다시 질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기자는 “한국어 시험처럼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했지만, 정작 전국민을 한국어 시험에 들게 해 국립국어원을 소환한 건 대통령 본인이다. 심지어 그에겐 ‘바이든’과 ‘날리면’으로 전국민 대상 한국어 듣기 평가를 실시한 전적이 있다. 기초 문해력이 의심되는 수준으로까지 언어를 왜곡해야 정당화되는 세계관이란 그냥 처음부터 비틀어진 세계관이다.
통치자의 왜곡된 언어로 이뤄진 윤석열 유니버스 연작(聯作)의 핵심 이벤트가 바로 그 언어를 무기로 하는 언론의 장악과 타락으로 드러나는 건 필연적이다. 이번 담화 이전의 이벤트인 KBS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인터뷰어인 박장범 앵커는 김건희 여사가 부당하게 습득한 명품 가방을 굳이 ‘파우치’ ‘조그마한 백’이라고 명명해 빈축을 샀다. 그리고 현재, 그 박장범 앵커가 KBS 사장 후보로 임명 제청되어 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언어의 합리성은 무너지고 있지만 그 몰락의 서사만큼은 웬만한 할리우드 연작 영화보다 개연적이다. 박장범 후보자는 지난 10월 진행된 면접에서 “기본적으로 언론에서 구분하는 품목은 생필품과 사치품 두 가지 분류이지 명품은 없다”며 “수입 사치품을 왜 명품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파우치’ 명명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로 본인이 제시한 그 분류를 따라 김건희 여사가 받은 가방을 ‘수입 사치품’이라 말하지 않은 건 박장범 본인이다. 당장 앞에서 한 말을 바로 뒤에서 부정해도 흔들리지 않는 윤석열 유니버스에서 애꿎게 흔들리고 넘어지는 건 언어의 규범을 믿는 평범하게 상식적인 국민들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 철면피한 왜곡 앞에서 국립국어원의 권위는 무력하다. 그럼 어떻게 상식의 언어를 복원할 수 있을까. 언어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이영철 역)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훈육이다.” 대통령과 곡학아세하는 언론에게 훈육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