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함도 후속 조치 보고서 유네스코에 제출
강제동원 역사 설명 등 한국 요구 불수용
한·일 강제병합 합법 주장 모니터 철거 안해
사도광산 이어 정부의 협상 실패 비판 재점화할 듯
일본이 2015년 군함도(하시마 탄광) 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약속했던 후속 조치를 9년이 넘도록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전시하지 않은 데다, 한·일 강제병합이 합법이라는 내용의 전시물도 철거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유감을 표명했다. 지난해 11월 일본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 사태까지 겹치면서 정부가 대일 협상에서 실패했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해 12월1일 군함도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따른 후속 조치 보고서를 제출했다. 앞서 세계유산위원회가 2023년 45차 회의에서 당사국(한국)과 대화 지속, 조선인 노동자 등 전체 역사의 설명 등 조치를 일본에 주문했다. 일본이 2015년 군함도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약속한 조치 이행이 미흡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세계유산위는 그러면서 “일본이 유산 해석전략 강화를 위한 추가 조치들에 대한 진전 사항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일본이 유네스코 측에 보고서를 낸 것이다.
보고서를 보면, 일본은 이번에도 그간 한국이 요구한 사항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에 ‘다수의 한국인 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로 노역’한 역사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의 전시, 진정한 추모 조치 등을 요구해왔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일본이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며 개관한 곳이다. 또 일본이 2023년 9월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일방적으로 설치한, 한·일 강제병합의 합법성 주장이 담긴 모니터의 즉각 철거도 촉구했다.
일본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이번에 조선인 노동자 증언의 연구용 참고자료를 비치했지만 증언 자체를 소개한 게 아니고 서가에 꽂아놓는 데 그쳤다. 또 군함도에 살던 주민의 증언만 추가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부 자료가 추가됐지만 한국인 강제동원과 무관하거나 노동환경 및 생활이 일본인과 차별적이지 않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며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자료의 철거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앞서 세계유산위는 2015년 7월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23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키로 결정했다. 대신 일본 측에 조선인 강제동원을 비롯해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는 한·일 간 협상 결과로, 일본도 수용했다. 일본 측 대표는 당시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조건 하에 강요된 노동(forced to work)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 발언을 일본이 강제노역을 인정한 첫 사례라며 성과로 꼽았다.
이후 일본은 2017·2019·2022년 세 차례 이행경과 보고서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했지만, ‘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등 후속 조치에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이 2020년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현지에서 약 1000km 떨어진 도쿄에 있다. 또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자료만 전시했다. 이에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제44차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일본 측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외교부는 이날 이번 일본의 보고서와 관련한 대변인 논평을 내고 “정부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거듭된 결정과 일본 스스로 약속한 후속 조치들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한다”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정부는 일본이 국제사회에 스스로 약속한 바에 따라 관련 후속 조치를 조속히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재차 촉구한다”고 했다.
정부는 이번 보고서와 관련해 외교 통로를 통해서도 일본 측에 유감 등을 표명할 계획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이 보고서에서 우리와 지속적으로 대화하겠다고 밝힌 만큼, 일본이 성실한 대화에 임할 것을 촉구할 것”이라며 “유네스코 차원에서도 일본의 약속 불이행을 계속 문제 제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유네스코에서 일본의 후속 조치가 미흡하다고 지적하면 일본의 국제사회 신뢰도가 하락할 수 있다. 다만 실질적인 불이익 등 약속 이행을 강제할 수단은 없다.
정부가 유네스코 측에 군함도 등의 유산 등재 취소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는 방법도 거론된다. 다만 실제 등재가 취소될지는 불확실하다. 유네스코 규정상 등재 취소는 유산 자체가 훼손됐거나 제대로 보전되지 않는 등 유산에 중대한 변경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중대한 변경’의 범위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어서 검토 중”이라며 “다양한 방안을 염두에 두고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일본의 조치 미이행이 향후 다른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이 앞으로 계속 합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면,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가 있는 다른 유산의 추가 등재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일본이 군함도 관련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지난해 7월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해 11월24일 개최한 사도광산 추도식에서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 등 재차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추도식에 불참하면서 결국 ‘반쪽 추도식’이 이뤄졌다. 정부가 일본의 선의에만 기대 잇따라 협상에 실패했다는 지적이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