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마당 깊은 집, 전주에서 놀다

2025-05-21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세계신화연구소에는 그리스 신화를 공부하는 ‘신화반’이 있다. 현재 제10기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고 있다. 지난 5월 10일 ‘신화반’ 선후배 포함 총 12명이 ‘마당 깊은 집, 전주에서 놀다’라는 제목으로 1박 2일간 전주를 다녀왔다. 2016년 연구소가 설립된 이래 매년 개최하는 행사다. 몇 년 전에는 연구소 회원 50여 명이 서울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이번엔 특히 『전라도 천년』의 작가 김화성 전 동아일보 기자가 인솔 교수로 동행했다.

일정은 매년 거의 똑같다. 첫째 날은 전주 시내 비빔밥 전문점에 집결하여 점심을 먹고 교외에 있는 귀신사歸信寺, 금산사, 금산교회, 강일순의 동곡약방, 정여립 집터, 동학 원평집강소, 수류성당 등을 둘러보고 전주 시내로 돌아와 전주 막걸리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고 가맥에서 가볍게 2차를 한 뒤 숙소로 향한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숙소 근처인 ‘혼불문학공원’을 거쳐 오송제까지 1시간 정도 산책하고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먹은 뒤 한옥 마을 내 경기전, 전주사고, 전동성당, 오목대, 향교 등을 탐방하고 해산한다.

기행에는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 법. 주로 인솔 교수가 탐방지에 숨어있는 일화를 소개하지만, 회원들도 그곳과 관련된 글을 낭독한다. 귀신사에서는 그 절을 배경으로 한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한 대목을 낭독하고, 오목대에서는 이성계가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른 뒤 그곳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한나라 시조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읊어 은근히 역성혁명의 의지를 내비치자, 동석했던 정몽주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근처 남고산성의 만경대에 올라가 크게 한탄하며 지은 우국시와 관련된 글을 낭독한다.

귀경 후 단톡방에 이번 전주 기행이 성지 순례였다며 귀신사와 금산사는 불교, 금산교회는 개신교, 전동성당과 수류성당은 천주교, 동곡약방은 증산교, 원평집강소는 천도교 성지라는 촌평이 올라왔다. 맞는 말이다. 근처 금구의 원불교 교당까지 포함하면 여러 종교 성지가 이렇게 한곳에 모여있는 경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전주 기행은 단순한 성지 순례를 넘어 세상 더께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의 참모습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이 코스를 기획하고 애정하는 이유다.

가령 금산교회는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해 남녀가 따로 앉도록 지은 ㄱ자 한옥교회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세운 거부 조덕삼의 미덕이다. 그는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였음에도 백정 출신 머슴 이자익과 함께 교회에 다녔고,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집사가 되었다. 그 후 장로 선거에도 두 사람이 함께 출마해, 예상외로 이자익이 당선되자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깨끗이 승복했고, 자신은 정작 2년 후에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사비를 들여 이자익을 평양 신학교로 보내 목사로 만들었다.

그래서 조덕삼에게서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소아시아 초대교회 신자들의 형제애가 엿보인다. 더 나아가 조덕삼은 신분과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동학군 김덕명 장군에게 원평집강소를 헌납한 백정 동록개의 분신分身이고, 모두가 평등한 후천개벽의 세상을 기약하며 구릿골에 동곡약방을 열고 천지공사를 펼친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의 분신이며, 신분엔 귀천이 없어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다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여립의 분신이다.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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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깊은 집 #전주

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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