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을 위한 합병은 없다

2025-12-12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의 워너브러더스(이하 워너) 인수전이 점입가경이다. 넷플릭스가 약 106조원에 워너를 인수한다는 초대형 계약을 성사시킨 지 사흘 만에 파라마운트가 ‘적대적 인수’를 선언했다. 여기에 파라마운트와 친분이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개입하겠다고 나서면서 ‘팝콘각’ 전개가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워너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와 상관없이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이 인수전의 가장 큰 패배자는 TV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란 점이다.

영화계 희망 삼키려는 스트리밍 공룡

102년 역사를 자랑하는 워너는 스트리밍 서비스 시대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영화 스튜디오다. 올해만 해도 <컨저링: 마지막 의식> 같은 팝콘 영화뿐 아니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웨폰> 같은 창의적인 영화를 연달아 흥행시키면서 역대 최고 수준의 성적을 거뒀다.

워너는 또 DC코믹스인 <슈퍼맨>, <배트맨>을 비롯해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같은 블록버스터 시리즈도 갖고 있다. 대중매체 전문지 ‘버라이어티’는 “워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를 그대로 살려내는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라며 “어떤 사람들은 영화가 마차처럼 쇠퇴하리라 생각하지만, 워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고 말했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던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극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워너의 영화는 영화산업 종사자들에게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희망과도 같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넷플릭스가 바로 그 워너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할리우드는 충격에 휩싸였다.

넷플릭스가 워너를 인수할 유력한 후보자로 떠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12월 4일(현지시간) 미 의회에 익명의 공개서한이 도착했다. 넷플릭스가 워너를 인수할 경우 “개봉 영화의 영향력을 줄여 극장 산업에 올가미를 씌울 것이고, 그로 인해 수백만개의 일자리와 소중한 예술이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한을 보낸 사람은 ‘(넷플릭스의 인수를) 우려하는 장편 영화 제작자들’이라고만 자신을 밝혔다. 이들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보복이 두려워서” 연판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버라이어티는 신뢰할 만한 소식통을 통해서 이 서한에 익명으로 동참한 사람 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 여럿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넷플릭스가 할리우드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넷플릭스의 시가총액은 4260억달러로 다른 모든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압도한다. 2위인 디즈니(1870억달러)와도 2배 이상의 격차다. 넷플릭스는 2025년에 약 180억달러를 콘텐츠 제작에 쏟아부었다.

이들이 넷플릭스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개봉 기간이다. 넷플릭스는 워너 인수전에 뛰어들면서 “우리는 워너의 현재 사업을 유지하고, 극장 개봉을 포함해 강점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업계 종사자들은 넷플릭스를 신뢰하지 않는다. 넷플릭스의 관심사는 영화의 퀄리티가 아니라 양이다. 새로운 구독자를 끌어들이고, 기존의 구독자를 붙잡기 위해선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쏟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인 테드 서랜도스는 지난 12월 5일 투자자들과의 컨퍼런스 콜에서 “극장 개봉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내가 반대하는 건 극장 독점 상영 기간이 길다는 것인데, 그건 소비자 친화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장은 워너 영화가 극장에 걸리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해나갈 것”이라고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이는 다시 말해 다음 <슈퍼맨> 시리즈는 기껏해야 극장에서 2주 동안만 상영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영화 <아바타> 시리즈를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서랜도스가 워너 영화를 극장에 계속 배급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느냐는 질문에 “그건 엉터리 미끼”라면서 “넷플릭스는 영화를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올리기 위해 1주일 동안만 극장에 걸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영화인들의 목소리는 자본의 논리 앞에서 아무 힘이 없었다. 12월 5일 파라마운트·컴캐스트와의 인수전에서 최종 승자가 된 넷플릭스는 워너의 영화·TV 스튜디오와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문을 720억달러(약 106조원)에 인수하는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10여 년 만의 최대 규모 인수·합병이라고 AFP통신은 전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넷플릭스 낙찰에 불만을 품은 파라마운트가 지난 12월 8일 ‘적대적 인수’를 선언하면서 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파라마운트는 엔터테인먼트 부문뿐 아니라 CNN, 디스커버리 등 케이블 채널까지 다 포함해 총 1084억달러(약 159조원)에 워너를 인수하겠다면서, 워너 주주들에게 주당 현금 30달러에 주식 매입을 제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파라마운트 CEO인 데이비드 엘리슨은 “우리는 영화를 사랑한다. 이를 보존하고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강조했다. 파라마운트와 워너가 합병하면 매년 30편가량의 영화를 극장에 개봉할 것이라는 약속도 했다. 넷플릭스 인수에 반발하는 여론을 겨냥한 발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파라마운트를 거들고 나섰다. 그는 “넷플릭스가 워너를 인수하면 점유율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며 “나는 이 결정에 관여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넷플릭스가 워너의 HBO 맥스를 인수하면 구독형 스트리밍 시장의 약 30%를 차지하게 돼 반독점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엘리슨과 친분이 깊고, 그의 부친인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와도 ‘절친’이다.

그러나 파라마운트가 넷플릭스 대신 워너 인수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나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2019년 디즈니가 21세기폭스를 인수했을 때 영화 애호가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더 많이 함께 출연할 수 있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돌아온 결과는 수천 명의 직원 해고와 독립영화 전문 스튜디오인 폭스2000픽처스 폐쇄였다.

USA투데이는 “안타까운 현실은 할리우드 산업의 합병이 주주가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라며 “경쟁이 줄어들면 스트리밍 구독 요금이 오르고, 영화 제작 스튜디오가 감소하면 신진 예술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창구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 둘 중 누가 승리하든, 영화와 TV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똑같을 것이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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