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인의 기품으로 살아남아

2025-11-03

민족의 소나무 ‘정이품송’이 서 있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에서 남쪽으로 고갯길을 넘어 7㎞ 남짓 지나면 장안면 서원리가 나온다. 마을을 감도는 개울을 따라 난 호젓한 도로 곁에는 근사한 기품의 소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인 ‘보은 서원리 소나무’다. 뿌리 근처 둘레 5m, 높이 15.2m로 서 있는 이 나무는 줄기가 둘로 갈라지며 사방으로 넓게 나뭇가지를 펼쳤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고르게 넓게 펼친 나무 생김새가 아름답다는 게 이 나무의 특징이다.

600년 넘게 살아온 것으로 짐작되는 이 나무를 사람들은 ‘정부인송(貞夫人松)’이라고 부른다. 누가 언제 붙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다. 외줄기로 곧게 뻗어 ‘남성적’으로 인식되는 정이품송과 달리, 두 갈래로 나뉘며 너른 품을 지닌 이 나무를 ‘여성적’이라 본 것이다.

‘정부인송’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회자한 것은 얄궂게도 정이품송의 영화가 쇠락하면서부터였다. 정이품송은 1980년대 초의 솔잎혹파리를 시작으로 태풍과 복토에 의한 피해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난을 겪으며 우아했던 수형이 처참한 지경으로 망가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정이품송 유전자 보존의 필요를 느꼈고, 그의 부인 격인 소나무에 대한 관심도 이즈음에 따라서 늘어난 것이지 싶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뉜 ‘정부인송’을 배필로 삼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후계목이 정이품송의 생김새를 닮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이품송의 혈통 보존 사업을 진행한 산림청은 강원 삼척의 금강소나무에서 ‘정이품송 후계목’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2001년의 일이다.

‘보은 서원리 소나무’에서 후계목을 얻은 건 그다음 순서였다. 정부인의 영예를 가지고도 장손을 얻는 데 실패한 셈이다. 곡절 속에서 ‘보은 서원리 소나무’는 여전히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옹골찬 정부인의 기품을 이어가고 있다.

나무를 사람살이에 빗대어 지켜온 우리 소나무 문화의 큰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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