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우리를 죽였다.” 민간인 대량학살을 국가가 자행한 한국전쟁기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실화 배경 뮤지컬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를 보던 중 이 대사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 ‘우리’라는 얼굴을 한 폭력이 수십만명의 ‘우리’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아프게 자각해서다. 17세기 인도 무굴제국 타지마할 완공 후 관련 예술가들과 기술자 2만명의 손목을 절단한 전설을 다룬 팩션 사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각에 잠을 못 이루었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목소리를 내는 작품 속 캐릭터들의 오열과 욕지거리가 모두 내 것 인양 폐부를 찌른다. 전혀 다른 시공간, 전혀 다른 장르, 전혀 다른 미학을 취하고 있음에도 두 작품은 닿아 있다. 가장 잔인한 폭력은 언제나 ‘우리’의 얼굴을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는 언제, 어떤 얼굴로 자기 국민을 적으로 만드는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우리’를 포기하고, 그 안의 ‘타자’를 만들어 경계 짓는가.
예술의 절단, 현실의 학살
사방이 성벽으로 천장까지 둘러싸인 넓은 무대. 바닥에는 큐빅 모양의 붉은색과 검은색 타일이 깔려 있다. 무대 양쪽에는 화롯불과 벤치 정도가 전부다. 남성 2인극 <타지마할의 근위병>(라지브 조셉 원작, 김희수 번역, 신유청 연출, 박상봉 무대, 강지혜 조명, 지미 세르 음향, 홍문기 의상)은 무대와 조명디자인부터 중세적이면서도 현대적이다. 잘 차려입은 2명의 말단 근위병이 등장하면서 관객은 그들의 본격적인 수다에 빠져든다. 오랜 친구 사이인 휴마윤(최재림·백석광 분)과 바불(이승주·박은석 분)이 앞뒤 어긋나게, 타지마할을 등지고 서 있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따르는 중이다. 사실 이 지시는 단순히 공간적 금기를 넘어선다. 다른 선택지,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천진한 몽상가인 바불은 계속 휴마윤에게 말을 걸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조각처럼 서서 입단속을 시키던 휴마윤도 어느새 바불의 상상 속에 들어선다. 별을 이야기하고, 사방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던 이들은 17세기 배경의 극인데도, 20세기에나 등장하는 ‘비행기’ 개념까지 도출한다. 부조리극의 파편처럼 알 듯 모를 듯 그들만의 티키타카는 자유로운 바불과 규칙과 명령에 얽매인 휴마윤의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어딘가로 날아오를 수 있다면, 저 벽 너머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이 세계는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갑자기 절단된다. 타지마할이 태양을 등지고 서서히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돌아보는 근위병들의 탄성에 암전. 그리고 다음 장은 핏빛 웅덩이들과 널브러진 핏덩이 같은 천 조각들이 가득한 피비린내의 무대다. 눈과 팔에서 피가 흐르는 휴마윤과 바불은 굳어진 안면과 손을 씻어내리고 마사지하며 황제의 명령으로 2만명의 손목 4만개를 잘라낸 일을 회상한다. 바불은 잘라내고 휴마윤은 그 절단면을 인두로 지져 최대한 출혈을 막았으나 이것은 2만명을 학살한 것과 진배없다. 두 손을 잃은 예술가들이 살아갈 수 있을까. 피 웅덩이를 닦고 치우면서 구르고 미끄러지고 구토와 오열을 반복할수록 더 깊게 절단되는 것은 인간의 상상 능력이고 두 청년 근위대의 추락이다.

신화의 씻김과 기록의 공백
반면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배시현 작·연출, 강철 작곡·음악, 신선호 안무, 김대한 무대, 김연수 조명, 허한나 음향)는 철저히 기록에서 출발한다. 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기 국가가 주도해 자국민을 대량학살한 실제 역사다.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은폐·왜곡됐다가 1960년 4·19 당시 비로소 유가족들의 증언이 수면 위로 나올 수 있었다. 작품의 시작 역시 4·19 혁명으로 목소리를 낸 민중의 심기일전이다. 대학생 우현(이선우·임태현·조성태 분)은 전쟁 중 잃은 큰형 희택을 수소문 중이다. 같은 대학 선배인 인경(최태이·장보람·윤지우 분) 역시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사살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중이다.
윤섭(임강성·김대웅·황두현 분)이 갓 신입 경찰이었던 1949년에 삼 형제의 비극은 시작된다. 일제 부역자 출신 경찰들에게 당하며 지내는 동생이 안타까워 희택(전흥선·나재엽 분)은 앞장서서 주위 친한 이들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받아낸다. 윤섭은 찝찝하다고 말렸으나 맏형 희택이 동생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이들은 무조건 빨갱이라며 군경이 대량학살했고, 분노하며 막아선 희택은 초반에 사살된다. 경찰인 윤섭은 다른 지역에서 대량학살을 집행하던 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윤섭은 형의 시신을 찾기 위해 켜켜이 쌓인 광산 갱도의 시신 더미를 파헤친다. 승리도, 정의도 없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자각을 돌아보며 윤섭은 오열하지만 현실은 주희(이은율·류비 분) 남편이자 아기 아빠인 경찰 중진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다.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는 120분 내내 이 과정을 설명적으로, 집요하게, 밀도 높게 담아낸다. 무대디자인은 1990년대 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1960년대 공간을 21세기형으로 고증한 듯 폐쇄된 형태다. 극이 전개될 때마다 아래층은 대량학살된 민간인의 시신이 방치된 폐광으로, 위층은 평화로웠던 고향과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해안가로 변신한다. 이 작품이 취하는 서술적 문법은 미학적 세련됨보다는, 역사를 지워버릴 수 없게 만드는 강박에 가깝다.
가장 결정적인 지점은 윤섭이 “이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윤섭은 이때부터 자신을 가해자가 아니라 책임을 짊어진 가장으로 이해한다. 학살은 범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에서 휴마윤이 바불의 손목을 자르며 토해 낸 말과 동일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완성된다. 윤섭은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평범한 인간이고 권력자의 지시에 순응하는 가장 위험한 가해자가 된다.
<타지마할의 근위병>과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는 모두 죽은 자를 호명하고 위무하며 마무리를 짓는다.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총천연색 새들을 상징하는 화려한 조명 사이로 씻김을 연상시키는 안개비가 무대 천장과 객석 후면서 쏟아져 나오는 스펙터클 무대 미학이다. 잘려 나간 4만개의 손을 위한 씻김이자 위로이며, 바불이 늘 말해온 상상력의 극치다.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는 위층의 열린 갈대밭과 바다 그리고 동네 지천으로 폈던 메꽃을 바라보는 인경과 우현의 엇갈림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윤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희택은 여전히 무덤도 없이 남아 있다.
인경의 말처럼 이 모든 비극은 우리가 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벌어졌다. ‘우리’와 ‘저들’을 가르는 아주 작은 언어에서 배제는 시작되고, 그 배제는 곧 학살의 논리가 된다. 두 작품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을 향해 묻는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를 ‘우리’에서 밀어내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을 ‘그런 일’로 처리하고 있지 않은가. 12·3 비상계엄 1주년이 지나가는 요즘, 두 달째 장기 상연하며 작품성으로, 소재로, 중독성 있는 음악으로 주목받는 이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는 12월 28일,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2026년 1월 4일까지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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