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우리 안의 파시즘

2024-12-29

“국회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앳된 얼굴의 20대 초중반 여성들이 소속을 묻는다. 그러더니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국회의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란다. 국회 출입증을 보여주니 그제서야 웃으며 보내줬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첫 번째 탄핵이 무산된 12월의 어느 날, 진보 매체에서 일하는 후배 A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적힌 글이다. 무엇이 MZ세대를 여의도까지 이끌었는지 생각하면 참담하다. 불법 ‘12·3 비상계엄’에 전 국민이 분노했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가짜뉴스’ 같던 일이 벌어진 지 27일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날 국회 출입문을 지키며 A와 맞닥뜨린 이들의 생각도 같았을 터다.

계엄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시와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만 가능하다.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국회의 정치 활동을 군대를 동원해 막으려고 시도한 것 자체가 위헌이고 불법이다. 쏟아지는 보도와 의혹까지 갈 것도 없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인생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쓴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꼽았다. 만약 이 책을 읽었다면 허투루 읽은 것이 분명하다. 윤 대통령이 틈날 때마다 해온 민간 주도의 시장경제라는 말도 그렇다. 자유주의자가 어떻게 비상계엄을 생각할 수 있는가. 어떻게 불법·위법을 저지르나. 대한민국 보수가 윤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대목이다.

계엄과 탄핵 사태로 한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480원대까지 치솟고 국고채 금리는 요동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국은 국정 공백에 손발이 묶여 있다. 윤 대통령은 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치명상을 입힌 지도자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이런데도 우국충정을 알아달라는 윤 대통령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는 자유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것은 대통령을 갉아먹은 전체주의의 생명력이다. A의 글을 SNS에서 처음 읽었을 때 감정이 복잡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시민이 국회의원에게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요구할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의가 있다고 모든 게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방송인 김갑수가 “가수 임영웅은 한국인의 자격이 없다”고 했을 때, “나라가 X판인데 여행을 갔느냐”며 여행 유튜버에게 온라인으로 조리돌림이 이뤄졌을 때도 그랬다. 정치에, 탄핵에 관심이 없다고 한국인으로서 사회적 사형선고를 받아야 하나. 윤 대통령의 모교인 충암고 학생들에 대한 폭언과 협박, 교무실 항의 전화도 폭력이다. 이번 사태 후 한 택시 운전사가 육군사관학교 생도를 태우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대통령과 방향이 다를 뿐 한국 사회에 침잠해 있는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나는 순간이다.

정치권은 더하다. 사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대행에 대행에 계속 내려가도 아무 상관없다”고 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 이후에도 계속해서 줄탄핵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민주당은 전남 무안공항의 여객기 사고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난 29일 조속한 수습을 위해 정부를 지원하겠다면서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재판관 3인을 지체 없이 임명하고 ‘쌍특검’을 수용하라는 압박을 잊지 않았다.

헌법재판관 임명은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수결이면 입법 폭주도, 경제 붕괴도 문제없다는 식의 발상은 소름 끼친다. 경제부총리가 외교와 안보를 떠맡는 것만 해도 기형적이다. 경제가 무너지면 서민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국민의 자유도 인간으로서의 삶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적대 관계가 격화될수록 그 적대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서로를 닮아간다”며 “한 군데에서 분노의 횃불이 타오르면 공포가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즉각적인 전염 작용으로 사회 전체가 폭력에 빠져든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무모한 시도는 역사적·법적 대가를 치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거짓 선동과 집단 린치도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무엇으로도 제한할 수 없다. 그것이 계엄이든 ‘국민의 명령’이라는 완장을 찬 이들의 협박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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